[세계의 눈/데이비드 브룩스]빈라덴은 왜 테러리스트가 됐나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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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오사마 빈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최대 건설회사 사장이던 아버지의 52명 자녀 가운데 17번째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생모는 15세였다. 시리아 출신의 생모는 집안에서 ‘노예’라 불렸고 빈라덴은 ‘노예의 자식’으로 통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에 관한 전기 ‘빈라덴 일가’를 쓴 스티브 콜은 “어린 빈라덴은 어머니 발밑에 누워 어머니 무릎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의 흐름을 바꾼 많은 인물들처럼 빈라덴의 어린 시절도 불행했다. 그는 아홉 살에 생부를 잃었다. 생부는 사우디 아시르 지역에서 미국 조종사가 몰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9·11 당시 비행기 납치범들 중 5명이 그 지방 출신이다.(생부는 예멘 출신 가난한 짐꾼으로 1930년대 사우디로 이주한 뒤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도로 공사의 80%를 독식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빈라덴에게 2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유산을 물려준 것으로 알려졌다·역자 주)

빈라덴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고 콜은 기록하고 있다. 유럽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엘리트 학교에 다녔다. 비범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신실한 아이였다. 남들이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집 안으로 들어올 때면 눈을 감아 버렸다. 콜은 “빈라덴이 종교에 대해 헌신하는 방식들은 무슬림 사회에서도 꽤나 원칙주의자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그는 침략자에 대항해 싸우기를 원하는 젊고 이상에 가득 찬 아랍 투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전사(戰士)는 아니었지만 안내자이자 조직자였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 국적을 박탈당했고 집안과도 의절하는 등 개인적 희생도 치렀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사우디가 목소리를 내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사업도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그의 안에 있던 급진주의가 자라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의 리더라면 강하고 위협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라덴은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인물이었다. 흔히 테러리스트란 조직과 구성원들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빈라덴은 오히려 조직을 허물었다. 중앙에 의존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 냈다. 빈라덴은 상징들로 가득한 후기 산업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인권 유린과 분노가 가득한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빈라덴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이유는 거대한 힘에 의해 흘러가는 역사라는 것이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존 방법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악(惡)을 자행하기도 한다. 분석가들은 미래의 위협을 예측하고, 현재에 내재된 위험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분석하지만 그 누구도 빈라덴의 삶과 그가 가져온 거대한 영향을 예측하지 못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지금 아랍에 폭력적인 빈라덴이 아니라 ‘민주적인 빈라덴’이 자라나는 것이다. 지금 모든 아랍세계는 자유와 존엄에 굶주려 있다. 사악하지 않은, 폭력이 아닌 말로 이것들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비극적이지만, 이는 역사가 아닌 인간의 문제이니까 말이다.

데이비드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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