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윤종구]‘老차관, 少장관’ 일본의 실용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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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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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구 도쿄 특파원
윤종구 도쿄 특파원
후지이 히로히사(藤井裕久·79) 일본 관방차관은 관료와 정치가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 1955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엘리트 공무원의 출세 코스였던 옛 대장성에서 21년간 근무한 후 1977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참의원 2선, 중의원 7선. 1990년대 대장상을 두 차례 지냈고, 2009년 민주당 정권 초대 재무상을 맡았다. 역대 총리도 그를 원로로 예우해왔다. 그런 그가 지난달 개각에서 관방장관도 아닌 관방차관에 임명됐다. 일본 언론의 개각 기사에서 화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음 날 주요 뉴스로 취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그에게 경제부처 장관을 권했다. 세제개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대책 등 정권의 존망과 국가 장래를 좌우할 경제 문제를 풀기 위해 그에게 협조 요청을 보낸 것. 후지이 씨는 “격무인 장관을 맡기엔 건강이 좋지 않으니 차관 자리를 달라”고 자청했다고 한다. 그가 ‘모시는’ 관방장관은 46세의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씨. 후지이 차관의 말처럼 자신이 일본 경제정책을 입안하던 시절에 에다노 장관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노(老)차관은 젊은 장관을 깍듯이 모신다.

일본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에다노 관방장관은 불과 5개월 전 집권 민주당의 최고 요직인 간사장에서 간사장대리로 ‘강등’됐다. 우리로 치면 집권당 사무총장을 하루아침에 사무부총장으로 내려앉힌 셈이다. 당사자에겐 수치일 법하다. 하지만 그는 찍소리 하지 않고 간사장대리를 맡아 후임 간사장을 보필했다.

간 총리는 지난달 개각 때 와타나베 고조(渡部恒三·79) 전 중의원 부의장을 당 국회대책위원장에 기용할까 고민했다. 참의원 과반수를 장악한 야당을 상대하려면 그처럼 노련한 인물이 적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씨는 1969년 첫 배지를 단 14선 의원으로 전직 총리가 주로 맡아온 일한의원연맹 회장이자 당 최고고문이다. 이런 그를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58) 간사장의 지휘를 받는 국회대책위원장 후보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것 같지만, 당시 와타나베 씨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참의원 의장을 지낸 에다 사쓰키(江田五月·70) 의원을 법무장관에 기용한 것도 우리 기준에선 예사롭지 않은 인사였다.

자민당 정권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91∼93년 총리를 지냈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씨는 2001년 한참 후배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가 경제난 돌파를 위해 경제통인 그에게 손을 내밀자 흔쾌히 재무상을 맡았다. 한국 정치풍토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일본 민주당이나 자민당에선 국제국 청년국 등의 실무국장은 물론이고 부국장까지 대부분 국회의원이다. 초선이든 30대 나이든 상관없이 일단 배지만 달면 실무직함과는 담을 쌓는 한국 정치권과는 많이 다르다. 국회 경력 30년을 넘긴 50대의 한 일본 국회의원 비서가 건넨 명함에 그냥 ‘○○ 의원 비서’라고 적힌 것을 보고 “의원실에 비서 위의 직함은 없느냐”고 물은 적 있다. 비서 위에 비서관, 그 위에 보좌관이 층층이 있는 한국 의원실 조직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비서의 답은 명료했다. “비서면 다 비서지 다른 직함이 뭐 필요한가요.” 일본 정치가 탈도 많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일 중심 실용주의’만큼은 꼭 배웠으면 한다.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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