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창혁]리영희의 부음에 조영래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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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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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12일, 그러니까 ‘20년 전 나흘 뒤’다. 햇병아리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에게 “폐암으로 숨진 조영래 변호사의 빈소를 취재해 ‘窓’으로 출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지금도 동아일보 지면으로 이어지고 있는 ‘窓(창)’은 젊은 사회부 기자들의 순수한 열정을 담아내는, 말 그대로 시대의 창이다.

조영래라는 사람에 대해 그동안 들은 바 없지 않았지만, 지시를 내리는 선배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1969년 사상 최고 점수로 서울대 전체 수석을 차지한 천재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마치 마음속의 별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그런 망연함이었다. “많은 사람이 볼 테니 정말 잘 써야 한다”는 선배의 당부를 뒤로 하고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으로 향했다.

독재정권마저 포용했던 휴머니스트

사람이 많았다. 기억을 되살리려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니 ‘노동자에서부터 공안검사까지’ 빈소를 찾았다고 돼 있다. 그냥 빈소 모습이 아니라 고인(故人)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또 전하고 싶어 자정 무렵 다시 빈소로 향했다. “그는 항상 무언가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전태일에, 권인숙에, 망원동 수재민들에게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하나 부연설명이 필요한 이름이고 사건들이지만, 모두가 이(利)로움을 좇는 시대에 홀로 의(義)로움을 좇다 마흔세 해를 마감한 고인의 치열한 행장(行狀)이었다.

하지만 그가 골몰했던 것은 ‘우리 사회를 어떤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제약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라는 휴머니즘의 문제였다고 어느 후배는 말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그리고 리영희 선생의 취중 한 마디. “유신정권 그 암울했던 시절 많은 민주투사들은 박 정권을 증오하고 배척했지만 조 변호사는 독재정권마저도 포용하면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구했다. 그런 일은 환갑이 넘은 나도 생각하기 힘든 것인데….” 그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인 안경환 교수는 ‘조영래 평전’(2006년)에서 “박정희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자고 말하여 주위의 빈축과 경탄을 동시에 샀던 조영래, 분열과 질시로 치닫는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더욱 아쉬워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신문기자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목격했지만, 지금처럼 입만 열면 좌파니 우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분열과 질시가 일상화된 때를 보지 못했다. TV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싸구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역겹다. 예컨대 박정희의 쿠데타에는 구국(救國)의 진정성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목도하는 이른바 좌우, 보혁의 싸움엔 오직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만 보일 뿐이다.

지금의 이념 싸움을 보고 뭐라 할까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 있다면 우파의 완장들은 아마 그에게도 좌파나 친북의 멍에를 씌워 대한민국 문밖으로 내몰려 할 것이다. “인간 조영래는 모든 것을 이성의 힘으로 설계하고 이성의 힘으로 소화했다. 그의 죽음은 광기의 시대에 이성으로 일관하다 힘에 부쳐 쓰러진 도중하차이다. 그의 병명을 ‘시대암’이라고 진단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조영래 평전’)

1980년대를 사로잡았던 시인 최승자는 등단 초기 ‘내가 살아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썼다. 얼마 전 신문에서 최승자의 그 시구절을 보고 전율했다. 그러나 안도했다. 박정희의 진정이나 조영래, 리영희의 이성은 살아남겠지만 나의 졸필도, 오늘의 이 값싼 좌우놀음도 결국엔 ‘영원한 루머’에 불과할 것이므로.

며칠 뒤면 조영래 변호사의 20주기 기일(忌日)이다. 마음속으로 20년 전 그의 빈소를 다시 찾아가 본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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