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재범]아이돌에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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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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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곳에서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은 소설가 폴은 애니라는 낯선 여인에게 구조를 받는다. 애니는 폴에게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 소설을 다시 쓰도록 강요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을 되살리라며 살해 위협까지 하는 여인. 폴은 살아남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새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스릴러 ‘미저리’의 줄거리다. 미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캐시 베이츠의 호연과 탄탄한 구성이 돋보이는 ‘미저리’에서 애니는 폴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애호가, 즉 ‘팬(fan)’이다.

팬의 사전적 정의는 ‘운동 경기나 선수 또는 연극, 영화, 음악 따위나 배우, 가수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팬이란 호칭에는 정상적인 것이 아닌 광적인 선호, 집착이란 의미가 숨어 있다. 따지고 보면 팬(fan)이란 단어 자체가 광신자라는 의미의 ‘퍼내틱(fanatic)’을 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의 팬은 대개 정상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 ‘미저리’의 애니가 그렇고, 제목부터 ‘더 팬’인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는 좋아하는 프로야구 스타를 위해 살인을 하고 자신을 위해 홈런을 쳐달라며 스타의 아들을 납치한다. 마니아 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오타쿠(おたく)’란 말이나 이를 한국적으로 변형시킨 ‘덕후’란 표현은 ‘폐쇄적이고 비정상적인 집착’이란 의미가 훨씬 더 강하다.

대중문화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스타 시스템이 이끌었고, 그 스타 시스템의 중요한 인프라가 팬이라고 보면 참 이율배반적인 시선이다. 지금 대중문화의 주역은 아이돌이라고 한다. 아이돌이 대중문화의 중심에 선 데는 팬층이 크게 넓어진 것이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무엇보다 ‘이모팬’, ‘삼촌팬’으로 불리는 30대 이상 팬이 몰라보게 늘었다.

아직 많은 이모, 삼촌팬은 당당하게 “난 OOO을 좋아한다”고 밝히기 주저한다. 많게는 띠동갑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걸 ‘비정상적’으로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도 아닌데, 아이돌 스타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남몰래, 아니면 같은 팬끼리만 공유한다. 얼마 전 끝난 KBS 2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7%대의 시청률로 시작해 시청률 20%를 넘지 못한 채 끝났다. 방송가의 통상적인 잣대로 보면 결코 성공이라 말할 수 없는 수치다. 하지만 방송관계자들은 ‘성균관 스캔들’을 하반기 방송된 드라마 중 많은 화제와 스타를 낳은 ‘핫(hot)’ 작품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평가를 하는 데는 ‘성스폐인’으로 불린 열정적인 팬들의 존재가 큰 몫을 한다. 드라마와 연기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방영 내내 온라인의 각종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고, 숱한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그 덕분에 10%대 시청률의 드라마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시즌2 제작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모두 ‘성스앓이’를 한 팬들이 이룬 성과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간혹 그 감정이 지나쳐 왜곡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일부가 그렇다고 전체를 매도할 수도 없고 그런 쑥덕임이 두려워 속내를 숨기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이제 마음껏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나이가 열 살, 스무 살이 어리면 어떤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나이 차는 그저 숫자일 뿐인데.

김재범 스포츠동아 엔터테인먼트부장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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