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국치 100년은 반성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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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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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01년 위암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독사유감(讀史有感)’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역사서를 읽다가 우산국의 멸망사에 주목한 듯하다.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은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우산국은 신라의 항복 요구를 줄기차게 거부했다. 요새를 방불케 하는 울릉도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지연의 ‘조선멸망’ 경고가 현실로

이사부는 계략을 쓴다. 나무를 깎아 사자 모형 100개를 만들어 금색으로 칠하고 배로 울릉도까지 싣고 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풀어놓아 너희를 밟아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진짜 사자로 착각한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무릎을 꿇는다.

이 글에서 위암은 우산국의 멸망 과정을 소개하면서 ‘처음에는 어찌 그리 강경했으며 나중에는 어찌 그리 유약했는가. 먹으로 찍은 점처럼 작은 외로운 섬이 믿을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만 한갓 험준함을 믿기만 했으니 그 백성의 어리석음을 알 만하다’라고 개탄했다. 그리고는 조선의 처지를 상기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나무로 만든 사자의 협박이 전후(前後)로 늘어서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백성의 어리석음이 우산국보다 심하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를 가진 자, 서둘러 먼저 백성을 가르쳐서 나무 사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속임수인지 정수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면 나라가 보존되고 나라가 흥성하는 큰 기본이 아니겠는가.’

장지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9년 뒤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조약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 육군의 기병참모 요시다 겐지로는 병합의 현장에서 활동했음을 큰 영광이라고 토로하면서 ‘일한병합 시말(始末)’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이 문건은 병합조약이 체결된 8월 22일의 상황에 대해 ‘서울 시내는 지극히 평온했다’고 썼다. 8월 29일 있었던 조약 공포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여전히 평온하여 경비상 특별한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다른 사람이 쓴 당시 기록에도 같은 묘사가 나온다. 나라가 망했는데 서울은 평온했다니 오늘날 한국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허망한 결말이었다.

100년 전 한일 병합조약이 공포되던 날을 우리는 국치일이라고 부른다. 그날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을 다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각성에서 나온 명칭이다. 앞으로 국권 침탈을 막으려면 왜 조선이 무너졌는지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있고 대비해 나갈 수 있다.

우리 내부 잘못 더 돌아봐야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이 망한 원인에 대해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중고교생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국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교과서는 19세기 말 우리가 근대 문물을 수용하고 근대 문화를 형성했다고 소개한 뒤 바로 일본의 식민 통치와 민족의 수난으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읽는 사람들은 조선이 당시 세계 흐름에 맞춰 근대화를 열심히 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식민 통치를 받게 됐는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한동안 학계에서는 국망에서 조선의 책임을 제기하면 ‘식민사관’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무능함을 강조했던 역사관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 사관이 힘을 얻었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침략 때문에 우리의 자생적인 근대화가 좌절됐다는 ‘외부 책임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했던 역사는 어느 한 쪽의 시각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서양 세력이 군사력을 이용해 거세게 밀고 들어오던 격랑의 시대에 조선 왕실은 국가와 국민을 지킬 부국강병에 실패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섣불리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책을 범했다. 장지연이 말하는 ‘진짜 사자’와 ‘가짜 사자’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외부 책임론만으로는 국치일 당일 조선 민중의 평온함도 설명할 수 없다. 조선의 지도층이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면 나라가 멸망하는 순간에 과연 가만히 있었을지 의문이다.

학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조선의 망국에 대해 외부 책임론이 우세한 반면 우리 내부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성찰과 반성의 움직임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누구도 부끄러운 측면을 새삼 들춰내는 일이 내킬 리 없다. 하지만 내부 책임과 외부 책임 사이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남의 책임을 따지는 일에만 몰두해 있으면 우리 스스로를 보완할 기회를 잃고 앞으로 같은 불행을 다시 겪을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어느 때보다 반성 쪽에 무게중심을 둘 필요가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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