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태환]국내 금융 인프라를 수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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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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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는 공교롭게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의 우등생인 발트 3국과 중부유럽 국가에 가장 큰 타격을 줬다. EBRD의 정책조언대로 시장을 조기에 개방한 국가가 글로벌 위기에 가장 취약했다. 옛 소련의 위성국가를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시키는 일을 목적으로 1991년에 설립돼 체제전환 국가를 20년 가까이 지원해온 EBRD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EBRD의 우등생이 자본시장을 개방한 결과 금융 산업은 인접 국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웨덴 등 다국적 은행에 점령되다시피 했다. 발트 3국은 은행 총자산의 90% 이상을 외국 자본이 보유했다. 중부유럽의 강자인 헝가리의 경우 외국계 은행의 시장점유율이 80%나 된다.

이들 국가는 개방 초기에 외국계 은행이 싼 금리의 외화자금을 가져와 대출해주자 단맛을 즐겼다. 외화소득이 없는 일반 가계가 외화표시 장기 모기지 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외화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환 위험에 노출된 가계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경제의 거품이 일시에 꺼지자 소규모 개방경제에 닥친 고통은 컸다. 자성의 차원에서 EBRD가 제시한 대안이 자국통화로 표시된 은행대출의 확대와 국내 채권시장의 육성사업이다.

5월 EBRD 연차 총회 때 한국 대표가 63개국 대표 앞에서 이들의 금융시장 육성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금융 인프라 산업을 유상 또는 무상으로 수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우리가 어떤 부문을 지원할지 짚어보고 민과 관이 함께 진출하여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정부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우선 거시경제 안정화정책을 도와줄 수 있다. 자국통화 표시 금융시장 육성을 위해서는 물가를 비롯한 거시경제 안정이 필수 전제조건이다. 물가가 불안할 경우 국내 저축률을 높이기 어렵고, 따라서 금융상품을 구매할 자체 여력의 조성이 힘들다. EBRD 수뇌부는 필자에게 우리나라 통화정책을 전수할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물가뿐 만 아니라 경상수지 재정 환율 등 거시경제 전반에 걸친 경제안정화 정책을 추진해본 우리의 경험은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둘째는 채권시장 관련 전산시스템을 지원하고 나아가 증권관련법, 파산법 등 우리의 법규 수출도 시도해 볼 만하다. 정부 차원의 자문 및 지원은 물론 무상으로 추진해야 한다.

민간 쪽에서는 다양한 금융기업이 진출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개인 및 기업에 대한 신용정보의 축적과 유통이 미흡해 금융거래가 원활하지 못하다. 국내의 토종 신용평가사가 진출하여 금융 인프라를 깔아 주는 일도 적극 권장할 만하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두 나라를 선정하여 집중 지원함으로써 모범사례를 만들어 나가는 게 좋다. 우리나라가 원전 공사를 수주할 가능성이 높은 터키, 우리와 자원외교 및 경협활동이 활발한 카자흐스탄을 추천할 만하다. 자원부국인 아제르바이잔은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이 2개뿐이어서 현재로서는 금융 인프라를 지원하기가 마땅치 않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 규모나 소득이 일정수준에 도달하는 일만으로는 미흡하다. 우리의 규범과 가치체계가 과학 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표준으로 하나둘씩 자리 잡을 때 길이 보인다. 중앙아시아 국가가 구미 선진국보다는 우리와 눈높이가 가깝다. 이들 국가에 금융 인프라를 수출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가 된다.

김태환 유럽부흥개발은행 한국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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