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칼루가(Kaluga)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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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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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9시 모스크바 기차역에 내려 이타르타스통신 사무실에 들르자 한국 기자 일행을 맞은 사람은 이름도 생소한 칼루가라는 곳의 블라디미르 포템킨 부지사(63)였다. 그는 “한국 기자들을 맞기 위해 새벽부터 차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왔다”며 “한국 기업들 덕분에 죽은 도시가 살아났다”고 했다.

모스크바 남서쪽 170km 칼루가 주 접경지대에 들어서니 ‘칼루지스카야 오블라스티’라고 적힌 빨간색 표지판이 보였다. 그 뒤로 표지판보다 더 크게 ‘SAMSUNG(삼성)’ 간판이 보였다. 마치 이곳을 접수라도 한 듯 위풍당당해 보였다.

칼루가 주는 640년 역사의 고도(古都)다. 한때 최첨단 과학 도시였다. 도시 오브닌스크는 1954년 5000kW급 세계 첫 상용 원전이 가동된 곳이다. 원자로(原子爐) 불을 끈 게 2002년 4월 30일로 세계에서 가장 수명이 긴 원전(48년)으로 기록돼 있다. 인근에는 여러 연구기관이 있어 주 전체가 커다란 방위산업 도시이다 보니 소비에트 연방시절엔 외국인 출입이 아예 금지됐었다.

‘자랑거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방위산업기술 의존도가 약해지자 실업률이 20%대까지 치솟았다. 양질의 과학기술 인재는 있으나 자원이 없는 칼루가는 교육과 사회간접자본시설 투자에 힘쓰는 한편 과감한 개방정책을 폈다.

2006년 6월 투자지원법을 통과시키면서 본격화된 외자유치 실적은 놀랍다. 현재 6개 공단 절반에 달하는 45%의 땅에 들어선 80여 개 외국 기업이 3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2007년 폴크스바겐이 조립공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볼보가 지난해 1월 트럭공장을 세웠고 푸조시트로앵과 미쓰비시도 2012년부터 공장 가동을 계획하고 있다. 로레알, 네슬레, 한국의 롯데제과와 KT&G까지 둥지를 틀었다. 외국 기업이 몰리다 보니 1인당 월평균임금도 2005년 220달러에서 2008년 480달러로 치솟았다.

비결은 투자금액에 따라 법인세를 아예 면제해 주는 파격적인 세제 지원과 간소한 인허가. 2008년 8월부터 TV 생산에 들어간 삼성전자 공장은 설립부터 가동까지 9개월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겨울에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 때문에 전기 수도 가스를 끌어오는 공사만 평균 2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부지사가 3개월간 매일 공사현장으로 출근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준공 후에도 주재원 비자 갱신 편의에서부터 교통신호등 설치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주려고 하는 그들을 보면서 과연 사회주의를 경험한 러시아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상수 법인장·상무)

칼루가 주는 대학교육도 철저하게 기업 수요에 맞췄다. 금속공장 인력이 모자란다고 하면 금속학과를 개설하고 건축 인력이 필요하면 건축학과를 개설하는 식이었다. 포템킨 부지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라고 했다. 생애 대부분을 사회주의체제에서 살아 온 60대 러시아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이곳의 실업률은 2%대라고 했다. ‘20대 4명 중 한 명이 백수’라는 한국의 현실이 겹쳐졌다. 칼루가를 나오는 길에 다시 만난 ‘삼성’ 간판을 보며 자랑스러움 대신 어느새 러시아 벽촌 지역까지 우리 경쟁상대로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나, 마음이 무거웠다.―칼루가에서

허문명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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