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비운의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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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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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틀린 말은 아니다. 승부의 세계인 스포츠에선 더욱 그렇다. 팬들은 정상에 선 이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등은 이등과 실력 차에 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명예와 부를 누리기도 한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황태자 어니 엘스를 비교해보면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황태자는 황제보다 여섯 살이나 많지만 여전히 황태자다. 홈런왕 이승엽과 1년 선배인 만년 2인자 심정수의 경우도 그랬다.

일등에 심취하다 보면 평범한 이의 어쩌다 하는 일등은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냥 일등이 아니라 비범한 재능을 갖춘 천재의 일등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그 천재가 비운의 천재라면 굳이 지금 일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제갈공명은 삼국지연의가 탄생시킨 최고의 천재다. 비와 바람을 뜻대로 움직이며 적벽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고 죽어선 산 사마중달을 쫓아냈다. 하지만 공명 역시 승부의 관점에서 보면 영락없는 패배자다. 천하삼분지계를 이뤄 촉한(蜀漢)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천하통일의 대업은 위(魏)에 넘겨줘야 했다. 공명의 신출귀몰함은 정사(正史)와는 차이가 나고 사실무근인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공명이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비운의 천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공명은 천하를 얻지 못했기에 더 빛난 인물이었다. 덕(德)만 앞세워 공명이 내놓은 실용적 책략을 자주 물리친 유비는 어찌 보면 최악의 주군(主君)이었다. 전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촉이 위를 이긴다는 것 역시 애당초 무리였다.

SK 야구단 김성근 감독은 선수 시절 왼손 강속구 투수로 꽤나 이름을 날렸지만 솔직히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령탑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야구의 신으로 불린다. LG 감독 시절인 2002년 막강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2승 4패로 무릎을 꿇었을 때 적장이었던 김응룡 감독이 “정말 지긋지긋한 상대”라며 붙여준 별명이다. 상대적으로 약체인 LG를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은 패장이 됐지만 더 큰 박수를 받았다.

지구촌 스포츠 최대 축제로 불리는 월드컵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허정무 감독은 남아공에서 뛸 23명보다 3명이 많은 26명으로 태극전사를 압축시켜 놓고 최종 낙점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가는 선수는 이동국이다. 31세인 이동국은 이름값에 비해 월드컵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앞서 역대 최연소인 만 18세에 태극마크를 단 그는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골문을 향해 유일하게 슛을 날린 선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네덜란드에 0-5로 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동국은 4강 신화를 이룬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나 최종 명단에 들지 못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불운을 겪었다.

남아공 월드컵까지 12년을 기다린 이동국은 16일 에콰도르와의 평가전에서 허벅지를 다쳤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6명이 몰려 있는 공격수 자리는 경합이 가장 치열한 포지션이다. 박주영을 뺀 5명 중 2명은 아웃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쪼록 이번 월드컵은 이동국이 ‘비운의 스트라이커’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기회의 무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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