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라는 시의 일부를 옮겨본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나는 확신하는 바이다//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성실하고 공정하게!’
나는 김남주의 극좌(極左)이념은 싫어하지만 그의 시는 좋아한다. ‘어떤 관료’를 읽으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젊은 나이에 고위 관료로 출세한 Q가 생각난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정권 역시 그를 중용했고 한때는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물론 현 정부 들어서도 그의 영예는 계속되고 있다. 이렇듯 처세에 능한 그지만 식인종 같은 북한의 김정일이 쳐들어온다면 그가 김남주의 ‘어떤 관료’와는 달리 맞서 싸울 거라 믿고 싶다.
우리 주위에는 Q를 능가하는 기회주의자가 수두룩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세종시 입안에 관여했던 어떤 관료는 지금 그 부당성을 알리는 전문가로 돌변했다. 햇볕정책의 전도사를 자임했던 어떤 관료는 현 정권 들어 배교자(背敎者)가 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지난 정권에 대한 배신과 현 정권에 대한 과잉충성은 기회주의자의 특징이다. 그래서 올 2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관료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모양이다.
영혼 없는 정책이 부를 재정 위기
영혼 없는 관료들의 과잉충성 때문에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포퓰리즘적 재정확대정책을 부추겼다. 공공부채를 포함한 국가부채는 올해 초 국내총생산(GDP)의 36%에서 연말이면 51%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라면 몇 년 안 가 재정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외부충격에 약한 우리 경제의 특성상 재정위기는 곧바로 제2의 외환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관료들의 기회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안보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군 장성들의 기회주의다. ‘천안함 사태’는 김정일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2007년 2월 노 전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한미 연합사령부가 갖고 있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2012년 4월 환수하기로 했다. 그때 육해공군의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옷 벗을 각오하고 전작권 전환의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장군이 있기는 있었던가.
전작권 전환을 위해서는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현역병의 복무기간 단축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나 올해 국방예산 인상률이 7.9%에서 3.8%로 대폭 삭감됐을 때 이에 공개적으로 항의한 장군이 있었던가. 작년 9월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이 정부의 복무기간 단축에 제동을 거는 법안을 발의했을 때 이 법안에 공개적으로 찬성한 별들이 있었던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결정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군에 대한 문민지배 원칙이 확고한 미국에서도 군인들이 할 말은 한다. 1977년 존 싱글러브 전 주한유엔군 참모장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계획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다 전역 조치되었다. 작년 12월에는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 사령관이 병력 증원에 부정적이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설득해 3만 병력을 증원받았다.
왜 우리나라에는 싱글러브나 매크리스털 같은 소신파 군인이 드물까. 미 시카고대 경제학과 존 리스트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선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주어진 인센티브에 기회주의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의 연구를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우리 사회의 인센티브 구조가 소신파를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단시하기 때문에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것이다.
할말 하는 소신파 軍·官이 없다
우리의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는 대통령의 능력이 공무원들의 인센티브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대통령이 유능하면 공무원도 따라서 유능해진다. 그렇지만 선거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민주주의의 속성상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은 집권을 위한 포퓰리즘의 유혹에 시달리고 관료들은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기회주의자가 되기 쉽다.
6·2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포퓰리즘과 기회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우리 국민이 김정일의 오판을 막고 나라의 선진화를 이룩하려면 포퓰리즘을 멀리하고 기회주의자를 경원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과 여론지도층이 포퓰리즘과 기회주의의 위험성을 국민에게 끊임없이 경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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