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경미]‘스펙용’ 競試열풍, 문과생까지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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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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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를 잡아라, 혹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의 대사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카르페 디엠은 매 순간을 열심히 살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현재를 즐기고 보자는 허무주의와도 연결된다. 말하자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의미가 강하다. 이런 카르페 디엠이 엉뚱하게도 입학사정관에게 읽히는 자기소개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구가 되었다.

자기소개서를 전문으로 하는 사교육 업체에서 작성한 어떤 자기소개서는 ‘귀 대학교는 저의 좌우명인 카르페 디엠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곳입니다’라고 서두를 열고 있다. 카르페 디엠을 그리 적절하지 않게 사용한 이 문장은 입학사정관제를 겨냥하여 남과 차별화하고자 작성한 학원가의 작품인 것이다. 이 도입문이 입학사정관의 눈길을 끌었을지, 그보다는 순수하게 작성한 학생의 자기소개서가 더 호소력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입학사정관제 도입으로 학생의 ‘스펙’을 관리하고 자기소개서를 대필해주는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과연 입학사정관이 혜안이 있어서 지원자가 자연산 인재인지, 사교육을 통해 길러지고 포장된 양식 인재인지 판별하고 지원자의 잠재력까지 가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학원가에서는 자연산 인재처럼 보이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호언한다.

입학사정관제 도입 초기부터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돼 왔지만 최근 새로이 등장한 문제는 문과 경시(競試) 열풍이다. 고등학생은 수학과 과학 올림피아드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는다. 엄마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 수학과 과학은 얼굴, 영어와 문과 과목은 몸매라는 표현이다. 수학과 과학은 선천적인 재능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외국어와 인문·사회과학 과목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성취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올림피아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려서부터 내공을 쌓아온 학생과 경쟁하여 실적을 내기 어렵지만 경제경시, 증권경시, 생활법경시, 철학올림피아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모의유엔, 경제 AP, 통일토론대회 등의 소위 문과 경시는 비교적 단기간의 준비로도 수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문과 학생은 입학사정관제의 확대와 더불어 문과 경시를 통한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있다. 한때 내신과 수능, 논술을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비유했는데 이제 인문계열 지망 학생에게는 이 세 가지에 문과 경시까지 더해져 ‘고난의 사각형’이 되어 버렸다.

고등학생 시절 정형화된 학과 공부 이외에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전문적 식견을 쌓아 가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다. 그러나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제도가 우리 특유의 교육 열풍과 만나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질된다. 내신과 수능은 학교 수업과 인터넷 강의를 통해 산간벽지에서도 준비할 수 있지만 문과 경시 대비는 대도시의 학원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형평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히 최근의 교육포럼에서 경시를 배제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발언이 있었는데, 확실한 정책화로 학생이 문과 경시에 내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근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는 학생 비율을 대폭 늘리고 선도 대학을 추가로 선정하는 등 무리하게 제도를 확대하고 있지만, 입학사정관제와 더불어 나타나는 이런 부작용에 대응하면서 천천히 나아갈 필요가 있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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