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우리의 변호사 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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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2일 2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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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변호사 후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당시 이들이 주고받은 서신에서 자주 목격되는 표현이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에게 보낸 독립운동가들의 존경과 신뢰가 피부에 와 닿는다. 그는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피압박 조선인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많이 했다. 이런 공적으로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2004년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핍박 받는 조선인 무료 변론

후세 변호사는 1923년 8월 1일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날 밤 서울 종로구 낙원동 천도교당(현 수운회관) 강당에서 청년들에게 강연을 했다. 7개월여 전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이 만든 북성회가 주최한 자리였다. 이 단체는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을 위해 결성됐다. 이날 행사장에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거렸다.

세 번째 연사로 나온 그는 여러 차례 제지를 받으며 ‘조선의 자유’를 역설했다. 위험 수위를 넘는 발언이 나올 때마다 일본 관헌(官憲)은 제지했다. 강연이 잠시 중단되는 일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 강연 도중 그는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8월 5일자 신문에 그가 설파한 강연 요지(200자 원고지 25장 분량)를 국한문 혼용체로 게재했다.

“어둠 속에서 광명을 간절히 바라듯, 소중한 자유를 빼앗겼을 때는 그 전보다 더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법이다.…조선에서는 정치문제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평화의 문제다.…이 강연을 압박하는 것은 조선 문제만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압박하는 것이다.”

후세 변호사는 이후 네 차례 조선으로 와 무료변론, 항의고발, 순회강연을 했다. 한 달 뒤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 학살 만행에 대해 “조선인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드리고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죄문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가 맡은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2·8독립선언의 최팔용, 백관수 사건 △의혈단원 김시현의 일본총독부 폭파기도 사건 △박열, 가네코 부부의 일본 왕세자 결혼식장 폭파기도 사건 △김지섭의 일본 궁성 폭탄투척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를 가리지 않았다. 동양척식회사의 농지 수탈행위를 직접 조사해 ‘합법적 사기사건’으로 규정하고 토지를 빼앗긴 하의도 등 조선 농민들을 도운 것도 그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힌다. 그는 일본 전시체제가 강화된 1939년 이후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의인의 삶, 내년 다큐로 제작

기자 출신인 아들이 ‘어느 변호사의 생애’(이와나미 출판사·1963년)라는 책을 펴내 그의 행적을 알렸다. 일본 농민당 당원이었던 후세 변호사는 좌파계열 변호사라는 굴레와 반일감정 때문에 광복 후 오랫동안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 11월 그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한국 국회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는 ‘국제평화주의자, 조선해방의 은인’이라는 그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8월 발족한 ‘후세 변호사 다큐멘터리 제작위원회’는 제작비 6억 원을 들여 90분 정도 분량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내년 3월 한일 양국에서 공동시사를 갖는다. 김평우 대한변협회장은 “내년 2월 일본 제작팀이 내한하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의 일생을 다룬 책의 역서도 내년 현암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김학윤 하의도농민운동기념사업회장은 “후세 변호사는 일제강점기에 농지를 빼앗긴 우리 농민들의 은인이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내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의인(義人) 후세 변호사가 더욱 생각난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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