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화영]골방 도가니탕이 그리운 ‘이방인’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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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은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알베르 카뮈의 시적 산문집 ‘결혼·여름’의 첫 페이지 첫 문단이다. 티파사는 알제리의 지중해변, 옛 로마 유적이다. 햇빛 바다 바람 꽃 향초 그리고 젊은 육체가 장려했던 옛 제국의 폐허에서 봄을 맞아 눈부시게 관능적으로 삶의 기쁨을 노래하며 ‘인간과 세계의 결혼’을 예찬한다. 티파사의 봄에 매혹된 나는 1986년에 이 책을 처음 번역했다. 그 후 같은 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 전집’을 기획하여 23년 만에 ‘시사평론’을 끝으로 전 20권을 완간했다.

처음 몇 권의 책이 나올 때 출판사는 영천 고개 근처의 아담한 개인주택이었고 직원도 몇 되지 않아 가족적이었다. 원고지에 쓴 번역 원고 뭉치를 들고 가면 근처의 도가니탕 집에 같이 가서 식사를 했다. 음식점은 장사가 잘되는지 마당 뒤쪽으로 골방을 미로처럼 달아냈다. 음식 맛만큼이나 좁은 뒷방이 정겨웠다.

카뮈 번역 출판사 가족과의 추억

골방이 늘어가는 사이, 죽음이 삶에 대한 사랑을 더욱 뜨겁게 하는 소설 ‘이방인’이 나왔고, ‘부조리’의 감정을 출발로 인생은 과연 살아볼 만한지를 묻는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가, 프로방스의 평범한 풍경이 헐벗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태양의 후예’, 인간조건에 항거하는 ‘반항하는 인간’, ‘까다로운 살인자들’의 이야기, ‘정의의 사람들’, 세 권의 ‘작가 수첩’, 단편집 ‘유적과 왕국’의 번역이 이어졌다.

어느 날 출판사가 낯모를 동네로 옮겨갔다. 번역은 계속됐지만 원고지 시대는 끝나고 팩스와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여 기종이 업그레이드됐다. 인터넷이 원고 전달과 교정의 모든 일을 간소화하기 시작하면서 도가니탕 식사도 얼굴도 사라졌다. 나와 출판사의 관계는 전화와 인터넷과 은행 계좌로 단순화됐다. 다만 책에 대한 편집부의 직업정신은 한결같았다. 전화선 저 끝의 얼굴 모를 목소리나 e메일의 ID는 세월 따라 바뀌었지만 내 번역의 오류와 모호함과 의문점의 어느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고 나 자신은 추상적인 목소리와 규격화된 인터넷 수신자와 발신자에 불과해졌다. 첨단 기술문명의 혜택을 입는 동안 나는 새로 옮긴 출판사에 한 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전집이 완간되는 기회에 처음으로 증정본에 서명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전화번호를 대니 기사는 즉시 내비게이션에 등록하여 위치를 찾아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나무 한 그루 없는 낯선 동네. 어수선한 자동차 정비공장 저 너머 어느 건물 이마에 출판사의 이름이 녹색으로 크게 붙었다. 어둑한, 그러나 정결한 계단 위의 3층. 넓은 홀, 수많은 칸막이 속에 고인 깊은 침묵. 어떤 젊은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용무를 말하니 한 층 더 올라가라고 했다.

위층도 같은 칸막이와 같은 침묵. 홀의 저 끝에 처음 보는 여자분이 나왔다. 전화기 속의 귀 익은 목소리가 낯선 얼굴이 되었다. 빈 회의실로 안내됐다. 서명할 책 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옆에 놓아주는 커피를 마시며 나는 많은 책에 말없이 서명했다. 서명이 끝나자 다시 그 여자분이 나타나 증정본의 대금은 훗날 인세에서 제하겠다고 정중하게 통고했다. 우리의 짧은 인사.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기술문명이 제공한 편리하고 단순한 침묵의 세계 밖으로 나선 ‘이방인’의 눈앞에 겨울 오후의 찬 빛이 투명했다. 나는 20여 년 동안 꿈을 꿨던 것일까? 내가 이제 막 서명한 책에서 카뮈는 말했다. “내가 상대방을 모욕할 때면 나는 그의 눈이 무슨 색인지, 그가 더러 미소를 짓기도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미소를 짓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논쟁의 세례를 받아 4분의 3은 눈이 멀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 가운데가 아니라 실루엣의 세계에 사는 것이 된다.”

인터넷과 전화에 손과 발 묶여

그러나 그것은 20세기의 이야기였다. 이제 우리는 모욕도 논쟁도 하지 않는다. 다만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첨단기술의 추상 속으로 도가니탕은 물론 얼굴과 미소가, 악수하는 손이, 구체적인 ‘몸’이 사라져버렸다. 티파사의 봄은 잎과 가지를 친 겨울의 추상이 돼버리고 우리는 지금 첨단기술을 향유하는 중이다. 그 사이 부조리의 형이상학이 판타지의 게임으로 바뀌었다. “그렇긴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고 카뮈가 위로하듯 말했다. 봄이 오면, 거기, 티파사로 다시 가보고 싶다.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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