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루저, 아니 오빠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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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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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사람들에게 세금을 왕창 매기자! 이건 내가 키 작은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맨큐의 경제학’을 쓴 그레고리 맨큐가 우리나라 루저 논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 2년 전 ‘키의 적정 세금’이란 논문에서 주장한 소리다. 182cm 이상인 이들에게 세금 7.1%를 더 걷어 178cm 이하의 키 작은(!) 사람들에게 분배하자는 거다. ‘공리주의적 수입 분배’라는 부제(副題)대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다.

남자는 상처받은 것이다

그가 밝힌 과세 이유를 보면 열 받거나 맥 빠질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수입 있는 곳에 세금 있기 때문이란다. 사이버테러가 걱정되지도 않는지 프린스턴대의 두 여교수는 2006년 논문에서 “1인치 더 크면 수입이 1∼2% 더 는다”며 키가 클수록 똑똑해서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경향이 있다고 염장을 질렀다. 갤럽의 웰빙지수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올해 나온 논문 ‘꼭대기의 삶: 키의 이득’도 이를 뒷받침한다.

테러공포를 무릅쓰고 한 가지만 더 말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키 큰 남자를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도 무지 많다. 키가 크다는 건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다는 의미여서 우수한 2세를 낳을 확률도 커진다. 찰스 다윈도 자연선택보다 성적(性的) 선택이 더 세다고 했다.

그렇다면 TV 오락프로에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는 여대생의 발언에 왜 그리 이 땅의 남자들이 분노했는지, 외모 차별 방송을 노상 겪고 살아온 여자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내가 남자라면 어땠을까. 내재적 접근법으로 머리를 싸맨 끝에 얻어낸 해답이 경제난 속의 역린(逆鱗·임금의 노여움)이다. 용의 턱 아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노해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하고 남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판에 잘난 여자까지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자를 루저로 몰아가니 상처받은 자존심이 폭발한 거다.

키로 말할 것 같으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게 우리의 오래되고도 익숙한 정설이었다. 180cm가 넘는 한 남자는 “그들은 초중고교 시절 키 순서대로 줄서면서 피해를 본 탓인지 사회에선 죽기살기로 위너가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엔 키가 크든 작든 어떤 능력도 보여줄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안 쌓일 리 없다.

미국의 포린폴리시 7·8월호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미국 실업자의 80%가 남자이고 세계적으론 2800만 명의 남자가 실직했다며 ‘마초(남자다운 남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특히 세계화의 ‘마초 루저’는 결혼도 어렵다며 이제 이데올로기도, 문명도 아닌 남녀의 충돌이 글로벌 갈등의 축이 될 거라고 겁나게 예측했다.

여자는 차라리 ‘잡놈’이 그립다

그러고 보니 여성해방운동 이후 여자는 직업(career)과 피임(contraception)의 2C로 상당한 자유를 얻었지만 남자는 기득권을 잃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가슴을 친다. 대체로 남자는 자기주장에 강하고, 여자는 배려에 강하다는 게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도(1974년 성 차이를 부정했던 심리학자 엘리너 매코비도 1998년엔 이를 수정했다) 강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잘못된 고정관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이나 우리나 남자는 생활비의 3분의 2 이상을 대는데 여자가 가사노동의 3분의 2 이상을 한다고 불평등을 외치는 건 솔직히 앞뒤가 안 맞는 얘기다. 군 복무 의무까지 다하고도 무능한 정부와 유별난 교육열에 아이들과 아내를 영어나라로 보낸 뒤 ‘돈버는 소’처럼 사는 우리나라 남자들은 더 불쌍하다. 그렇다고 불만을 드러냈다간 남자답지 못한 ‘찌질이’로 찍히니 환장할 노릇일 터다.

마초의 수난시대는 영국도 예외가 아닌지 최근 더 타임스는 “남자다움의 가치가 훼손되면서 공격적이거나 용렬한 남자가 는다”며 남자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되레 여자가 괴로워진다고 했다. 이런 게 약한 여자가 강한 남자를 은근히 조종하는 기술이라고 장 자크 루소도 ‘에밀’에서 일러준 바 있다.

그래서 이제부턴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는,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으로 부를 작정이다.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비단 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는/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기’(문정희 시 ‘오빠’)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들도 알아야 할 게 있다. 아무리 양성평등사회를 강조하고 법과 제도를 구비해도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다시 남자를 위하여’) 말이다. 공인도 아닌 젊은 처자의 말 한마디에 뒤집어지는 남자들보다는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검은 눈썹을 태우는/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을 여자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어쩌면 나랑 문 시인 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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