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1989년 독일과 1979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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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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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일에서 유행한다는 유머 한 토막. 오시(Ossi·옛 동독 출신 독일인)와 베시(Wessi·옛 서독 출신 독일인)가 베를린의 한 카페에 앉아있는데 천사가 다가와 소원을 물었다. 오시는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곧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베를린 장벽이 다시 세워졌다.

“그럼 당신은요?” 천사가 묻자 베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 그냥 카페라테 한잔 주세요.”

독재가 나았다는 사람도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에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전한 이 유머는 좀 무엄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자란 우리로선 다시 공산독재 치하로 돌아가고 싶다는 옛 동독인, 차라리 그러면 편하겠다는 옛 서독인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실제로 7월 독일의 슈피겔지는 동독 출신 주민 57%가 “동독엔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더 많았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온 세계가 떠들썩하게 환호했던 사람들이 왜 변심했을까. 과거는 아름답다고 여기는 인간본성의 발로라고 생각하면 속은 편하다. 하지만 “동독 출신 젊은 세대의 절반은 동독이 독재국가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독일 자유대학 클라우스 슈뢰더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복잡해진다. 정치에 관심 없고, 따라서 비밀경찰에게 끌려갈 위험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공산체제는 오히려 편할 수도 있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옛 동독의 공산독재에선 그래도 당과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먹고사는 게 가능했다. 민주주의와 함께 지도자를 뽑을 자유가 주어진 것까진 좋다. 그러나 자신의 삶도 선택을 해야 하고, 그래서 살기 힘들어지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건 싫다는 얘기다.

독일은 물론 동유럽에서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는 추세다. 특히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일수록 심하다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최근 보도했다. ‘강대국의 부활’을 실감케 해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권위주의 통치는 러시아에서 드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옛 동독에서도 공산당 잔당이 모인 좌파당에 민심이 쏠린다. 독재가 무너지면 단박에 잘살게 될 줄 믿었던 기대가 무너지자 포퓰리즘 독재 아니면 냉소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상이 지구촌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유신독재가 무너진 지 30년, 우리나라에선 여론조사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꼽히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여겨서만은 아니다. 다른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은 걸 보면 안다.

‘하면 되는 나라’ 그리 어렵나

입에 담기도 불경스럽지만,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닐 수도 있다. 능력도 품격도 없는 사람이 선거에서 선출돼 나라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보다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번영과 안정으로 이끄는 것을 더 원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 열매를 나도 맛보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박정희 신드롬이 처음 나타난 것도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패와 부패가 불거진 1997년 초였다. 그해 4월 동아일보 조사에서 응답자의 75.9%가 박정희를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평가했다. 지난달 ‘박정희와 그의 유산’ 국제학술대회에서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민주적으로 뽑힌 정부의 무능이 드러났을 때 박정희 향수(鄕愁)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환호와 환상이 깨지면서 사람들은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우리를 빈곤에서 구해낸 박정희의 탁월한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빵 없는 자유는 없다’를 쓴 역사학자 콘스탄틴 플레셰코프는 “옛 공산권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공평함과 자본주의의 부(富)를 원했다”고 했다. 공산권뿐 아니라 그게 사람의 보편적 심리다. 하지만 공산주의 계획경제에선 부가 나올 수 없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박정희의 ‘하면 된다’는 구호가 바로 공평함의 메시지였다고 박정희 연구에 천착해온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분석했다. 박정희 신드롬이 계속되는 이유 역시 그래도 그 시절엔 나도 열심히만 하면 지금보다, 부모 세대보다 잘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있더라도 최소한 불공평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옛 공산권이든, 지금 우리나라에서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강한 국가를 바란다면 언제까지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를 아는 사람들은 내 문제까지 해결해주진 않아도 ‘하면 되는 나라’를 만들어주는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정치에 큰 관심 없이 평범하게 사는 이들에게 사실 민주주의란 별 게 아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되더라’고 믿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는 모습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답고 정의롭다. 단, 하지도 않으면서 되는 일만 바라는 사람은 베를린의 천사와 함께 베를린 장벽 저쪽으로 넘어가줬으면 좋겠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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