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성호]“국치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 입력 2008년 10월 3일 02시 58분


“그 전쟁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1991년 9월 23일, 일본을 방문한 네덜란드 여왕 베아트릭스가 일왕 아키히토가 주최한 궁정만찬에서 한 따끔한 말이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희생된 자국 군민(軍民)의 수자까지 꼽아가며 16분 넘게 이어진 답사의 대미였다. 그에 앞서 겨우 7분짜리 환영사를 통해 “참 불행했던 일”이라며 그 전쟁을 스치듯 언급하고 넘어간 일왕과는 대조적이었다. 일 왕궁에 초대된 국빈 치고 그처럼 떳떳하게 또 구체적으로 일본의 과거를 지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일본 언론의 표현대로 가히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새삼 오래전 ‘이례(異例)’를 떠올리는 것은 이른바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이달 8일 1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 국민에게 끼친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넘어서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가당치 않게 ‘통석(痛惜)의 염(念)’ 운운하던 가해자의 과거에 비해 분명 진일보였고, 우리는 피해자가 베풀 수 있는 최대치의 너그러움으로 사죄를 받아들였다. 결과는 ‘미래지향’이라는 우리 대일외교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과거사 외면한 한일 미래지향

그로부터 10년 후, 또 한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의 4월 방일에서도 ‘미래지향’의 기조가 이어지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큰 틀에 있어서만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참여정부의 2003년 1차 방일과도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정권교체에서 살아남은 그 ‘미래지향’에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암묵적 외면’이 추동해온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문제는 그 외면의 후과(後果) 역시 전 정권의 전궤(前軌)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신사참배나 독도 문제를 놓고 되풀이되어 온 한일 외교 마찰과 관계 경색을 말하고자 함이다.

허나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도 할 만큼 해 봤다. 몰역사적인 ‘지향’만으로는 그 ‘미래’가 오기 어려움을 알 때도 됐다. 지난 10년간 우여곡절로 밀어 올려온 이 시시포스의 바위를 이제는 내려놓자는 말이 나오는 게 성마름의 탓만은 아닌 듯싶다.

하며 고심하던 차에 네덜란드 여왕의 ‘이례적인 발언’을 꺼내본다. 그 말에 십이분 공감하며, 지금도 엄정한 교훈을 얻는다. 그것은 피해자의 몸가짐이다. 할 말은 한다는 떳떳함이다.

여왕의 만찬사에는 이런 말도 들어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진지한 눈’으로 직시할 때 비로소 울분과 원한으로 가득한 마음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결코 가해자를 향한 타이름일 수만은 없다. 그 ‘진지한 눈’은 피해자 스스로에게도 있어야 한다.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독도 문제를 덮자고 일본 총리에게 통사정했다는 그 나라 신문 보도 따위는 안 믿는다. 믿자 해도 국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허나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의구심이 있다. ‘미래지향’의 대일외교에 과연 과거를 보는 ‘진지한 눈’은 있는가.

2010년이 내일모레다. 그네들이 명명한 바 ‘일한병합조약’의 조인이 1910년 8월 22일이었다. 우리의 국치(國恥) 100주년은 국내 과거사 문제를 넘어 한일 관계의 최대 현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대일 살풀이 한마당을 벌이자는 말이 아니다. ‘다케시마’를 들먹이면 1910년을 꺼낸다는 식의 하다못해 ‘실용외교’의 차원에서라도 좋다. 이 민감한 외교 문제를 풀 방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묻고자 함이다.

대통령, 日에 떳떳하게 말해야

그래서 나는 다음 번 일본 총리를 만날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해야 할 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국치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이례적인 발언’은 이를수록 좋다. 2년도 안 남은 시간이 결코 길지 않다. 그리하여 1910년의 체험을 직시하기 위한 고통의 터널로 먼저 이끌고 들어가야 한다. 터널의 끝은 들어선 후에야 보이는 법이다. 내일을 그리며 어제를 돌아보는 ‘진지한 눈’이 오늘의 우리 대일외교에 절실한 이유다.

그런 생각이 ‘한일 파트너십 선언’ 10주년을 앞두고 도쿄에서 들었다.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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