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다시 ‘민주화 투쟁’이 필요한 이유

  • 입력 2006년 12월 7일 19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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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부러웠으면 돈은 얼마든지 내더라도 당장 수입하고 싶었는지, 이해한다. 대통령이 그제 호주에서 극찬한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말이다. 호주산(産) 민주주의를 수입할 수 없다면 궁여지책으로 국민을 ‘수출’하는 것도 상상해 봄 직하다. 단, 호주에선 민주적 신념과 권리 자유 등 호주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맹세해야만 시민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기이한 점은 있다. 호주 이민국이 게시한 호주의 ‘가치와 원리’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대화와 타협’이라는 단어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法治무시한 타협이 민주주의?

호주 시민이 받아들여야 할 가치 중에도 첫 번째로 올라 있는 것이 법치(rule of law)다. 두 번째가 ‘정부의 민주적 원리’라며 괄호 안에 ‘그리고 헌법과 의회민주주의 같은 제도’를 인정해야 한다고 못 박아 놨다. 언론과 종교의 자유도 당당히 자리한다. 대화와 타협이면 되지, 법이 대수냐고 했다가는 호주로 놀러 갈 수는 있어도 살러 갈 수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집권세력이 자부하는 민주화 운동이 1인 1표의 선거라는 정치적 자유를 신장한 건 틀림없다. 하지만 호주의 모태이자 민주주의의 모태인 영국에서도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라는 자유주의가 선거보다 먼저 나왔다. 우리 헌법 전문에 나오는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도 자유주의 민주주의 순이다.

과중한 조세와 재산 강탈, 자유 침해에 시달리던 서구 시민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발전시킨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임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헷갈리고 있는 수많은 가치 전도(顚倒)가 정리될 수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원한 것도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였지 그들의 끝없는 집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선거만 있을 뿐 다른 자유가 없다면 선출된 집권세력의 권력 남용을 제어할 수 없다. 북한만 이사할 자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우리에게도 이사할 자유가 사라졌다. 그들만의 대화와 타협으로 엉뚱한 법을 쏟아내서다. 호주에선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법치를 대화와 타협보다 중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 집권층이 한껏 누리는 정치적 자유가 국민의 다른 자유를 얼마나 위협하는지는 부패지수를 보면 안다. 호주는 부패가 적은 나라 순으로 9위인데 한국은 43위다.

지난해 6월에 나온 ‘호주 경제학 논문집’에는 부패란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더 많이 생긴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정부가 커질수록, 그래서 ‘대책’이라는 이름의 규제를 쏟아 낼수록, 당연히 세금도 갈퀴로 긁어 갈수록 사람들은 법치를 무시하고 뇌물이라도 바쳐 경제적 자유를 지키려 한다. 정치의 자유보다 경제의 자유가 성장과 번영을 불러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자유는 130개국 중 35위다. 호주는 11위에 올라 있다(캐나다 프레이저 연구소 조사).

法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돈 있는 곳에 부패의 유혹은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 싹을 도려내는 방법도 법치에 있다. 정부는 헌법정신을 확실하게 구현하라고 두는 공공서비스 기관이지, 집권층의 자유를 위해 국민의 자유를 옥죄라고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정책과 규제의 차이도 개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더 키워 주는지, 그래서 우리 헌법에 명시된 대로 ‘각인(各人)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는지에 있다. 그러고도 뒤처지는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효율적 사회 안전망과 경쟁력 있는 교육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세금 때문에 못살겠다는 소리는 안 나온다. 내가 자유롭게 학교를 선택해 내 잠재능력을 극대화하고 싶다는데 그걸 막는 교육규제는 비인간적인 억압일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 만든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다. 유능한 통치자를 뽑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법에 정해진 시간표대로 무능한 통치자를 바꾸는 것도 민주화 투쟁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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