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죽은 학생이 그 상황에서 침묵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것 또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쓴소리라는 피드백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의사소통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볼 계기가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이 말의 내용인지, 스타일인지, 눈빛이나 태도인지, 단지 상대방의 편견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한지 그런 것들을 분석하고 성찰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또 ‘지금’ 그런 쓴소리를 들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졸업 후에는 그런 쓴소리를 해 주는 사람도 드물 뿐 아니라, 그때는 주로 고용이나 승진에서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그 반응이 온다. 말을 해 준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고, 상대방이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듣던 그 학생은 조금은 안도가 되었는지 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다음 수업부터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교수의 쓴소리 못지않게 학생의 돌출 행동도 때로는 교수에게 도움을 준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말의 역설(paradox)은 사회 도처에 있다. 말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주먹다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요, 적어도 서로 말문은 열려 있다는 뜻이다. 국가 간의 사안 때문에 외교관들 사이에 설전이 오간다는 것은, 아직 전쟁 같은 물리적인 힘의 행사가 억제되고 있다는 증거다. 수사학자들은 말이 물리적인 폭력과 강압을 예방하거나 지연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역설한다. ‘의견 불일치의 끝은 전쟁’이라는 미국의 수사학자 케네스 버크의 말은 설전(舌戰)과 실전(實戰)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쓴소리도 마찬가지다.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판하는 사람이 에너지를 소모할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비판을 하면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비판은 함께 사는 사회의 조건이기도 하다. 반대 의견이나 싫은 소리에 부닥치는 일은 공동체를 구성하며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 카를 포퍼는 ‘열린 사회’의 기준을 얼마나 쓴소리를 잘 참아 내는 사회인가에서 찾았다.
‘열렸다’는 당명을 지닌 여당이 이끄는 우리 사회는 과연 열린 사회인가? 권력 주변부의 사람들이 쓴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해답은 ‘아직 아니오’인 것 같다. 부동산 투기를 사회적 암이라고 비판한 이해찬 국무총리는 막상 자신이 투기꾼이라는 쓴소리를 듣자 그동안 바빠서 못 내려간 ‘주말농장’이라며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쓴소리가 변명이 되어 돌아왔다. 국정홍보처는 쓴소리를 업으로 하는 언론의 보도 중 ‘문제보도’를 가려내는 데 국고를 쓰고 있다. 한데 정부의 입맛에 달콤한 문제보도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여론을 폄훼하는 발언을 한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에게 쓴소리들이 쏟아지자, “그 시기 국민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강의가 되돌아온다. 그들이 쓴맛을 조금만 음미했더라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씁쓸함으로 가득 차 있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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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때론 비판만큼 좋은 선생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비판의 내용이 건전해야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을 받고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쓴맛을 참아 내는 인성(人性)과 쓴맛을 소화시킬 튼튼한 소화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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