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한국형 로비 네트워크

  • 입력 2000년 5월 12일 20시 24분


21세기는 ‘네트워크 시대’라고들 한다. 벤처야말로 네트워크산업이다. 몇 명 안되는 상근 직원만으로도 엄청난 매출액을 올리는 것은 바로 네트워크를 잘 구성하고 활용하기 때문이다. 벤처세계에서도 인맥은 금맥이라고 한다.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인맥은 ‘정보’를 통해 형성된다. 이런 것을 디지털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2건의 로비사건에서 볼 수 있는 우리사회의 망(網)은 아날로그 네트워크다.

▼가족주의 방식의 접근

린다 김이 정종택전환경부장관에게 접근하면서 내세운 것은 ‘혈연(血緣)’이다. 자기 어머니가 정씨와 동성동본이니 아저씨뻘이 아니냐며 ‘아저씨’로 불렀다는 얘기다. 정씨가 린다 김을 소개해준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은 정씨와 동향이며 고교후배니까 두 사람은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의 줄로 이어져 있다. 또 린다 김에게 연서(戀書)를 쓴 것으로 알려진 전직 장관 C씨와 K씨는 정씨의 대학동문으로, 정씨로부터 린다 김을 소개받은 것이다. 학연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무슨 일을 해결하려면 정상적인 길보다는 뒷길이나 사잇길을 찾는 경향이 심하다. 그쪽이 더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안다. 미국 상무부가 얼마 전에 펴낸 ‘무기시장 정보보고서’에는 ‘한국군의 무기구입은 개인적인 친분, 지연이나 학연, 권력 등이 동원된 로비를 통해 결정된다. 무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비공식만찬과 골프회동 등을 통해야 거래가 빨리 성사된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기준은 독특하다. 변호사의 실력이나 전문성보다는 사건 담당 판사와 어떤 ‘연(緣)’이 있느냐를 따진다. 고향이나 학교 선후배 관계, 아니면 고시동기생이냐 등등을 우선 알아본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회사 잘 돌아가게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쉽게 풀기 위해서는 힘있는 데 줄을 대놔야 한다. 줄을 만들기 위해 종친회 향우회 그리고 이런저런 특수대학원까지를 포함한 동문회 명부가 유용하게 활용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주변 기득권세력의 망과 연결돼야 한다. 정권교체 이후 호남의 특정고 출신들이 권력요직을 독점,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해 대통령까지 나서서 경고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하기야 동창회 명부, 인명록 관리만 잘하면 효과적 네트워크를 빠르고 손쉽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동양의 가족주의적인 미덕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고 저렇게 얽힌 줄을 통해 흐르는 정(情) 때문에 이 사회는 나름대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의혹의 초점은 권력실세

정이 흐르는 사회가 나쁠 건 없다. 문제는 합리적인 판단, 투명한 프로세스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을 흐리게 하는 것이 정실(情實)이요, 여기에 돈이 끼여들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점이다.

돈의 수요가 많은 곳이 정치권이다. 그래서 로비의 대상은 항상 정치인들이다. 로비를 하는 사람들도 정치인들에게 접근하기가 쉽고 그들을 통해 권력의 핵에 줄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로비사건, 특히 수천억원 규모의 국책사업의 비리가 터질 때마다 의혹의 초점은 일개 장관 정도가 아닌 더 깊숙한 권력의 실세쪽으로 모아진다. 그 실세는 경우에 따라서는 최고권력자 자신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심복일 수도 있다. 이번 두 로비의혹사건의 수사결과에 세인의 눈길이 모아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도 미국 등 다른 나라처럼 ‘로비활동 공개법’ 같은 것을 만들어 로비를 양성화 투명화하면 부정의 소지를 없앨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어느 정도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을 찾아 뒷거래를 하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네트워크 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안을 찾아내지 않으면 어떤 법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방안의 하나는 정치권의 돈 흐름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개혁의 중심은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결국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정치일꾼들에게 이런 개혁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다.

<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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