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 전우용 “‘한국 첫 룸살롱’ 명백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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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3월 17일 1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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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우용 씨 페이스북 갈무리
사진=전우용 씨 페이스북 갈무리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17일 유명 강사 설민석 씨가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에 휩싸인 것과 관련,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한 건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전우용 씨는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 먹고 독립 선언했다’는 유명 한국사 강사(설민석 씨)의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보이기에 재미삼아 한 마디 얹는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전 씨는 “33인이 탑골공원 현장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지휘하지 않고 따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데 대한 비판은 운동 당시부터 있었지만, 이는 관점의 문제이니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면서 “다만 3.1운동 70주년이던 1989년에 어떤 분이 ‘33인은 민족대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글을 썼다가 살해위협까지 받았던 데 비하면, 지금 관련자들의 반발은 아주 온화하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한 건 명백한 거짓말”이라면서 “우리나라에서 ‘요리장기(料理粧妓)’ 즉 기생이 시중드는 요릿집이 처음 생긴 건 1898년으로 추정된다. 1900년에는 현재의 서린동에 혜천관이, 1903년에는 현재의 일민미술관 자리에 명월관이 문을 열었다. ‘기생이 시중드는 요릿집’이 생긴 배경은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지만,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년 망육순 칭경예식’ 공연차 지방에서 올라왔던 기생들이 행사가 무산된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 이런 요릿집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명월관은 1914년에 당시 이완용 소유였던 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냈다”며 “이 집 안에 태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태화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의 호가 ‘양파’였기 때문에, 이 요릿집에 출입하던 기생들은 이 정자를 ‘다마네기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명월관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은 1921년 미국 부인 외국 선교부(남감리회 여선교부)에 팔려 태화여자관이 되었고, 명월관이라는 상호는 1920년 돈의동에서 장춘관을 운영하던 이종구에게 팔렸다”고 밝혔다.

전 씨는 “당시 요릿집들이 음식과 섹슈얼리티를 함께 팔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룸살롱’과 비슷하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는 명예는 요릿집이 아니라 ‘별별색주가’나 ‘내외주점’에게 돌려야 한다”면서 “요릿집은 룸살롱이라기보다는 ‘피로연장’이나 ‘회식장소’의 원조였다. 1919년 4월 ‘한성정부’를 선포한 국민대표대회도 서린동의 봉춘관이라는 요릿집에서 열렸다. 당시 요릿집은 결혼식 피로연장, 회갑연장, 신문사 망년회장, 사회단체 창립총회장 등으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한 것도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기생 시중 받으며 낮술 먹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것도 상상력이 과도한 주장”이라며 “그냥 평범한 한국사 강사가 한 얘기라면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설민석 씨가) 워낙 젊은 층의 역사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고 하니, 짚어둘 지점이 있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격 없는 사람들이 최고로 인정받는 것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집단적 시각장애’가, 정치 영역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면서 “골동품 보는 안목이 없는 사람이 ‘골동품 수집’ 취미를 가지면, 반드시 온 집안을 가짜로 채우게 된다”고 강조했다.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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