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무뎌진 치명적 고통… 인위적 유쾌 부담스럽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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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긴’ ★★★

정신병원 원장 라긴(남명렬·왼쪽)은 환자 이반(백익남)과의 거침없는 대화를 통해 익숙했던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라긴이 미쳤다고 몰아세운다. 신귀만 제공
정신병원 원장 라긴(남명렬·왼쪽)은 환자 이반(백익남)과의 거침없는 대화를 통해 익숙했던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라긴이 미쳤다고 몰아세운다. 신귀만 제공
“병원은 부도덕한 시설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건강에 극도로 유해한 시설이죠. 나는 늘 환자를, 아니 세상을 속이는 기분입니다.”

노년의 정신과 의사 라긴(남명렬)이 한참을 망설이다 털어놓은 고백. 마주 앉은 환자 이반(백익남)이 대뜸 답한다. “허참, 새삼스럽게. 다른 사람들도 대충 다 압니다. 그냥 적당히 눈감고 살아가는 거죠. 혼자 고상한 척하지 마세요.”

사실을 포장 않고 그대로 드러내 이야기하면 자칫 미친 사람 취급 받기 쉽다. 부조리한 사실이라면 더욱 그저 못 본 체 슬쩍 지나치는 편이 개인의 존재에 이롭다. 한 사람의 토로는 어차피 부조리를 변화시킬 수 없다. 시원하게 토해 낸 사실은 부메랑처럼 날아와 개인의 존재를 위협하기 일쑤다. 평생 큰 탈 없이 살아온 주인공 라긴은 문득 참지 못하고 뱉어 낸 자각에 휩쓸려 정신병 환자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 연극의 원작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소설 ‘6호 병동’(1892년)이다. 시골 마을 정신병원 원장이 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미치광이로 몰리는 과정을 그렸다. 현대사회가 정신병 환자에게 우선적으로 행하는 처치는 격리 수용이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다. 왜 불편할까. 무대 위에 오른 환자 3명이 보여 주는 공통점에 그 답이 있다. 체호프는 이 사회가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을 정신병 환자로 내몬다고 봤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무대의 분위기는 내내 밝고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그 또한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 주려는 연출 의도일 수 있겠으나, 잔혹한 주제를 짊어진 부담감이 무대 밖으로 더 또렷이 전해진다. 이야기하려는 바의 암울함을 좀 더 솔직히 인정하고 오히려 작정한 듯 아슬아슬한 수위까지 과감한 표현을 끌어냈다면 어땠을까.

라긴은 일상의 무료함 탓에 집어든 작은 호기심에 이끌려 몰락한다. 그의 변화를 파멸로 해석할지, 해방으로 판단할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치명적인 인식 변화가 별반 치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후반부의 희극적 포장을 확 벗겨 버린 무대가 궁금하다. 라긴은 두려움을 버리고 ‘고통’에 다가갔다. 객석도 한 발쯤 더 다가가서 구경해볼 만한 고통이다.

: : i : :

김태현 극본, 김원석 연출. 김용태 김철환 전윤지 장준환 김경욱 출연. 10월 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3관. 2만5000원. 02-3673-2003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라긴#6호 병동#정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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