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부 폐지’ 힘겨루기/기자의 눈]밭 갈다 콩잎 뜯어 먹었다고 소를 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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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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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 사회부 기자
이태훈 사회부 기자
2006년 4월 하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수사 중이던 현대자동차그룹 비자금 사건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다. 당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횡령 혐의가 이미 드러난 상태여서 세간의 관심은 온통 정 회장의 구속 여부에 쏠렸다. 정 회장을 선처해 달라는 경제5단체장 명의의 탄원서가 검찰에 제출되는 등 정 회장의 구속을 놓고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정상명 검찰총장도 고심을 거듭했다. 정 총장의 고민이 길어지면서 재계에서 ‘정 회장 불구속설’이 나돌았다. 대검 출입기자 사이에서 ‘검찰총장과 중수부 수사팀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자 중수부 수사팀은 술렁였다. 하지만 4월 26일 대검은 정 회장에 대한 구속수사 방침을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다음 날 영장을 청구해 정 회장을 구속수감했다. 큰 논란치고는 결말이 다소 싱거웠다.

이 대목에서 정 총장의 마음을 ‘구속’ 쪽으로 움직인 일화가 있다. 정 회장 구속을 일관되게 주장한 중수부 수사검사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윤석열(현 대검 중수2과장), 윤대진 검사(현 부부장)가 4월 26일 정 총장을 전격 면담했다. 두 검사는 “정 회장을 법대로 구속해야 한다”며 사직서를 동시에 내밀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 정 총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원칙을 지키려는 수사검사의 충정을 이해한다. 내가 졌다”며 구속 방침을 확정했다. 윤 과장과 윤 부부장은 현재 중수부에서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를 수사하고 있다.

대검 중수부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정권이 검찰을 완전히 장악하던 5, 6공화국 때는 권력 실세들의 비리는 손도 못 대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수부가 ‘살아 있는 권력’엔 약하고 ‘이미 죽거나 약한 권력’에 강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이후 대검 중수부는 권력 비리 척결을 주도했다. 1997년 심재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 씨 비리를 밝혀 구속했다. 2002년에는 청와대 압력을 물리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 씨를 구속했다.

대검 중수부는 대통령 친인척 등 권력 실세, 국회의원과 장차관 등 고위공직자, 재벌 총수의 부패 비리를 수사하기 때문에 항상 유혹과 압력이 뒤따른다. 이를 물리친 것은 ‘검찰 내 최고의 검사’로 불리는 이들의 수사능력만이 아니었다. 거악(巨惡)과 맞닥뜨리면 반드시 뿌리 뽑아야만 사회가 진보한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었다.

대검 중수부 검사들 사이에서는 ‘언제든지 사표 쓸 각오를 하고 수사에 임한다’는 신조가 있다. 그동안 공(功)도 있고 허물도 있었지만 중수부 검사들이 거대 권력 비리에 맞서 고군분투한 노력이 우리 사회를 좀 더 공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황소가 밭을 갈다 콩잎을 좀 뜯어 먹었기로서니 소를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태훈 사회부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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