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동아일보-R&R조사]행시출신 30대공무원 삶과 의식

  • 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44분


《“‘사무관이 아니라 사무원’이라고 자조하기도 합니다.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에 박봉을 감수하고 이 길을 택했지만 지금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정부과천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행정고시 출신 사무관은 30일 “떠나고 싶다”고 밝혔다. 낮은 보수와 잦은 야근을 겪으면서도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잡무’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

▽일다운 일을 하고 싶다〓지난해 말 경제부처 사무관을 그만두고 외국계 컨설팅회사에 취직한 김모씨(32)는 “힘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비로소 창의적인 일을 한다는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공부했던 경제학 지식을 사무관 시절에 써 본 적이 없어요. 나름대로 자료를 모아 분석해 내놓으면 윗분은 ‘신빙성이 없다’며 묵살했고, 대신 기업인들이 밥 먹으면서 툭툭 던지는 말들을 포장해 ‘경제 동향’으로 보고하더군요.”

김씨는 “결국 실력 있는 사무관들이 장관 일정 뒤치다꺼리나 하게 되더라”며 관료 조직의 경직성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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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업무장애는 정치권"

모 부처의 사무관 박모씨(33)는 “장관용 보고서, 국회용 보고서 등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는 보고서 작성과 회의로 하루를 꼬박 보내야 하니 내 업무를 찬찬히 살피려면 야근을 안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6급 주사에게 잡무를 맡기려니 대부분 나이와 경력이 자신보다 많아 일 맡기기가 껄끄러워 결국 보고서 활자 크기 조절까지 직접 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국회가 열리면 의원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복도에서 종일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많은 사무관들은 국가 정책 수립에 기여한다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재정경제부 사무관 이모씨(32)는 “내가 준비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는 뛸 듯이 기쁘지만 단순작업 때문에 밤을 샐 때는 ‘때려치우자’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며 “어느 직업이든 일희일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상대적 박탈감〓“세월의 흐름 속에 고립되었다고 할까? 어느 사이엔가 증권이나 컴퓨터 같은 관심사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모 부처 사무관 김모씨(35)는 ‘유능함을 잃어간다는 생각’이 가장 괴로운 점이라고 강조했다. 민간 분야에서 활동하는 또래들은 전문성을 갖추며 ‘몸값’을 키워가는데 공무원들은 얕은 지식에 머문다는 것.

또 다른 사무관은 “최근에는 ‘힘있는 부서’ 대신 특허청처럼 나중에 변리사라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부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공무원 급여를 높이기 위한 대책을 시행 중이나 여전히 공직과 민간 분야 보수 차이는 크다. 행시 출신 7년차 사무관의 연봉은 2800만∼3000만원 정도. 같은 경력의 대기업 직원은 3500만∼3800만원, 로펌 변호사는 8000만원∼1억원 정도다. 외국계 기업에 스카우트되면 연봉을 1억500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무관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매력’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산업자원부 사무관 김모씨(32)는 “업무상 전화를 걸 때 아쉬운 소리 안하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힘든 공직생활을 지탱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김원배(金元培)기획관리실장은 “자부심 없이 고급 인력이 공직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며 “민간 우위의 시대가 됐는데도 책임은 정부에만 물어 ‘동네북’을 만드는 현실이 젊은 공무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미래를 준비한다〓경제부처 사무관 이모씨(33)는 출근 전에 영어회화학원에 다닌다. 밤늦게 퇴근한 후에도 신문 스크랩과 경제학 서적을 뒤적이며 경제 현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고시 출신이면 국장직이 보장되던 시대는 지났죠. 언젠가 ‘중책’을 맡을 때 두각을 나타내려면 평소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이씨는 불만은 많지만 스스로 선택한 이상 멋지게 해내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현재 유능한 공무원을 유치할 수 있는 유일한 인센티브는 국비 유학”이라고 말했다. 2년간 학비와 봉급을 국가가 지원하는 이 제도는 재충전에 목말라하는 젊은 공무원들의 돌파구인 한편 ‘탈 공직’을 결심하는 계기도 된다.

현재 유럽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사무관은 “2년간 가족에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전직(轉職)을 염두에 두고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이수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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