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컬처플러스]KBS드라마 '겨울연가'에 대한 단상

  • 입력 2002년 3월 10일 17시 35분


비슷한 것은 가짜라고 했던가요.

이 세상에 내가 둘이 아니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둘이 될 수 없다는 믿음.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내가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절망. ‘겨울연가’의 묘미는 바로 이 비슷한 가짜와 똑같은 진짜 사이에 있습니다.

비슷한 부분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지요. 성격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지나간 추억과 닥쳐올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끌리지요. 지난 시절 사랑의 아픔이 되살아났기 때문일까요.

한 인간을 둘로 나누어 살피는 분신(分身)의 테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외모가 똑같더라도 품성은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가짜가 늘 진짜보다도 더 진짜로 인정된다는 점입니다. ‘옹고집전’에서 욕심꾸러기 진(眞)고집은 원님에게 아무리 자신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 소설 ‘분신’의 주인공인 골랴드킨의 직장 동료들도 진짜보다 가짜를 더 선호하지요. 이런 아이러니는 나의 나다움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가(假)고집이 진(眞)고집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허수아비로 변하든, 가짜 골랴드킨이 끝까지 진짜 골랴드킨을 궁지로 내몰든, 지금까지 나를 규정했던 요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민형을 만나고 또 민형에게 끌리면서 유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 사람은 준상이 아니다. 준상이 아닌 사람을 준상으로 착각하여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진은 마음을 고쳐 먹으려고 애씁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이므로. 지나간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낯선 타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죄악이므로.

유진이 외면하려 해도 사랑의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비록 내가 준상은 아니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민형의 고백 앞에, 유진은 흔들리지요. 혹시 그때 유진은 자기 사랑의 근원을 되묻지는 않았을까요. 내가 왜 이 남자에게 끌리는 것일까. 준상과 닮았기 때문에? 진짜와 가장 비슷한 가짜이기 때문에?

일찍이 ‘시인과 촌장’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고 노래했지요. 유진은 불변하는 사랑의 공간으로 남겨두었던 준상의 자리를 민형으로 채웁니다. 과거의 사랑만큼이나 현재의 사랑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꼭 한 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죠.

드라마는 여기서 끝날 법도 하건만,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또다른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진(眞)준상과 가(假)준상의 대립을 무너트리고, 유진이 나눈 두 번의 사랑을 단 한 번의 사랑으로 귀속시키려는 겁니다. 비슷한 가짜를 똑같은 진짜로 바꾸기 위해, 작가는 기억상실증을 끌어들이고 교통사고를 만들어냅니다. 우연성의 남발이라거나 소재 부족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둘로 나누었던 준상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입니다.

이 조금 유치한 노력의 끝에 무엇이 남을까요. 작가는 준상의 기억을 모두 회복시킨 다음, 과거와 현재가 매끄럽게 이어졌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둘로 나뉘었던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해서, 과거와 현재의 사랑이 하나로 모일 수 있을까요.

유진의 사랑을 준상으로 단일화시키는 것보다 미래를 향해 열어두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으므로, 내 사랑의 근원 역시 다양할 것이고, 또 나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상대 역시 여러 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사랑을 마지막 사랑으로 여기는 것도 물론 아름답지만,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내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를 내 몸처럼 아끼는 그 사랑의 자세만은 바뀌지 말아야겠지요. 유진의 방황이 아름다운 이유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애쓰는 한결같은 마음 때문일 겁니다.

지금 혹시 가까이에 마음으로만 품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실패의 걱정일랑 접어두고, 차가운 머리보다 심장의 쿵쾅거림을 믿으세요. 그의 눈망울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사랑합니다, 고백하세요. 유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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