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의사 훈련, ‘도제식’에서 벗어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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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스트리아 학회에서 열린 첨단의료교육 현장. 필자 제공
최근 오스트리아 학회에서 열린 첨단의료교육 현장. 필자 제공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며칠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 흉부외과 학회(European Association for Cardio-thoracic Surgery)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학회가 그렇듯이 이번 학회도 각국의 의료수준을 보여주는 경연장으로 ‘보이지 않는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최고 의료 선진국들이 결과 지향적인 임상 성적 발표 중심의 지식 경연시대를 마감하고 차세대 도약을 위한 기술 표준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의료교육은 도제식으로 이뤄진다. 머리로 공부한 것을 직접 환자를 통해 연습하기가 힘드니까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거나 혹은 선배의 감독 하에 수술기술을 연마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만 이뤄졌던 도제식 교육이 돼지나 개 같은 동물, 심지어 인형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이번 학회를 통해 실감했다. 실로 의료교육의 혁명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번 학회에서는 장착형 판막의 장착 방법, 첨단 외과용 실과 바늘의 개발 및 돼지 생체 조직을 이용한 기술 연습, 흉강경을 이용해 상처를 최소화하는 침습수술, 인공 심폐기 같은 순환보조장치 운영과 심장을 여는 과정을 연습해볼 수 있는 인형의 등장 등이 중심 테마였다.

강사진은 유럽학회의 중진 명의들이었으며 이들은 각 의료관련 회사에서 초빙을 받아 기술 훈련 및 자신의 수술요령 등을 직접 설명해 가면서 수술기술을 직접 가르쳐주는 형태로 진행했다.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참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붐볐으며 사용되는 의료자재 역시 쓰고 남은 것이 아닌 신재료나 신개발 제품들이었다.

강의실 옆방 소강의장에서는 명의들이 준비해온 기존 동영상과 이를 배우고 연습한 또 다른 의사들의 동영상을 비교 분석해 줌으로써 대가의 족집게 과외가 아주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리베이트 논란으로 시끄러운 사이 각종 의료재료 기기와 재료를 생산하는 회사들이 의학 발전을 위해 대가들을 모셔다 놓고 의료 기술 교육의 장을 창조함으로써 교육 분야 후원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필자 역시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 다소 늦은 감이 있고 국내 교육 환경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수련과정에 있는 젊은 흉부외과의를 대상으로 동물을 이용하여 수련 과정을 열어 놓은 상태이다. 이제는 이러한 교육 혁신을 통해 대가들의 구체적인 기술이 자신의 차별화의 비결 역할뿐 아니라 자신보다 훌륭한 후학들을 양산하는 도구로도 거듭나면 좋겠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필자가 흉부외과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론은 교과서 또는 논문으로 공부하고 의료기술은 선배 의사들의 수술과정을 보면서 한 수 한 수 가르침을 받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응급 환자들은 우리가 준비될 때가지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밤잠을 생략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학습 곡선을 서서히 어렵게 돌파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 그야말로 맞춤형 표준형 교육으로 변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항시 접근이 가능하고 자가 학습이 가능한 소위 시뮬레이션을 통해 의료진을 위한 기본 기술 양성체계가 시작되어야 한다. 운전을 배울 때 이론시험을 통과하고 교관이 운전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구경했다고 당장 도로에 나올 수 있겠는가? 훈련용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기술 숙달의 반복없이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 의료계에도 이런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교육형태의 새로운 창조의 장을 열자는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흉내낼 수 있는 인형도 이미 개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심장수술을 흉내낼 수 있는 인형도 개발되어있다. 한국의 의료교육에도 이를 위한 인력 공간 장비가 새로운 치원에서 준비되기 시작하면 좋겠다.

이 혁명적 의료교육의 변화는 사고 위험 없이 의사들이 마음 편하게 기술을 반복 숙달하고 그 과정을 표준화함으로써 자신감과 안정감, 실력을 갖추게 된다. 또 의사들에게 수련 기회를 늘리고 적절한 테스트를 통해 실전에 들어가기 전에 의료 기술을 가진 의사를 양산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명의(名醫)가 보편화되어 ‘명의 타령’을 덜 해도 되고 여기서 파생된 체계화된 시술은 세계 표준을 리드할 있는 지침으로 거듭나 우리 의료가 자연스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환자의 의사 선택권도 다양화되고 기다리는 시간도 단축 될 것임은 물론이다.

새 교육 패턴은 초기 투자 부담이 있을지는 몰라도 의료사고, 합병증 빈도, 중복비용 발생 등의 감소를 통한 효율화가 달성되어 건강 보험 재정에도 효자 노릇을 할 것이 분명하고 환자의 재정적 부담도 축소될 것이다. 의료계는 물론 정부차원에서 의료교육 훈련 패턴 개혁을 선도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유인책이 절실하다.
     
《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의사이자 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장을 지내 의료현장과 행정에 밝은 이정렬 박사의 ‘병원 이야기’를 이번 주부터 화요일자에 격주로 연재합니다. 의료한류를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 의료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해보자는 취지입니다. 필자가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제언이 한국 의료 선진화를 앞당기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유럽 흉부외과 학회#도제식#수술기술#신개발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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