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0)

  • 입력 1999년 12월 30일 14시 32분


그리고나서 팔십 구년 십일 월 구 일, 베를린.

나는 거기 있었어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었죠. 밥 짓기가 싫어서 사다 두었던 소시지를 물에 데치고 감자를 삶아서 겨자와 소금을 뿌려 먹었어요. 검은 빵에

치즈 바른 것과 함께 맥주 작은 병 하나를 마시고 있었어요. 전화 벨 소리가 울리더군요.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마틴과 함께 출장 간 이 선생의 전화이거니만 생각했어요. 수화기를 들었죠.

여보세요? 저예요….

한 형이야?

어, 이게 누구야….

누구긴 나 송영태야.

어머나, 참 한번 전화 했었지. 괴팅겐에 있다면서? 거기서 도대체 뭘하는 거야, 이 도깨비야.

공부하지 뭘해. 나 베를린 올라갈 일이 생겼는데 멕여주고 재워 줄래?

그래애 물론이지. 우리 집 지낼만 해. 헌데 무슨 일루 오는 거야?

몰랐어? 지금 텔레비 좀 봐라.

난 그런 거 없는데. 무슨 일 났어?

지금 독일 전국이 난리야. 동독 정부는 동서 베를린 장벽의 철폐와 자유왕래를 선언했어. 사실상 통일의 시작이라구. 장벽은 이제부터 무용지물이 될거야.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어서 내 대신 거리루 나가 보라구. 나두 내일 당장 올라가 볼려구 그래.

우리는 서로 집 주소며 전화번호 따위를 주고 받고 통화를 끝냈어요. 나는 그제서야 밖에서 무슨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 기웃이 창 밖으로 내다보았지만 이쪽은 안마당 쪽이라 거리가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러고 있는데 문에서 초인종이 울려요. 마리 할머니가 건너온 거예요.

유니, 텔레비젼 보다가 왔는데 장벽이 없어진대. 시민들이 온통 거리 동쪽으로 모여들구 있어.

방금 들었어요. 마리 우리 브란덴부르크나 알렉산더 광장으로 나가 봐요.

나두 그러려던 참이야.

다시 전화 벨 소리가 울리고, 이번에는 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윤희, 뉴스 들었어?

방금 들었어요.

엄청난 변화야. 나 지금 거의 다 왔어요. 여기 고속도론데 한 시간 뒷면 시내루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 역 앞 광장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지.

그래요 시내로 나가려던 길이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외출 준비를 하려는데 마리가 머뭇거리면서 내게 물었습니다.

저어…돈 가진 거 있어?

뭐 하게요?

샴페인 한 병 사야지.

샴페인이요?

그래, 이게 아마 내게는 마지막 축제가 되겠지만.

나는 그냥 트렌치코트만 걸치고 두터운 겨울 코트에 모자까지 쓴 마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어요. 편의점에 가서 샴페인 한 병을 사 들고 광장의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데 벌써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은 서로 경적을 울리고 거리의 젊은이들은 축제 때 쓰는 뿔나팔을 불고 법석이었어요. 중심가로 갈수록 사람들은 그 넓은 도로를 메울 정도로 불어나 있었고 노래를 부르거나 웃으면서 서로 포옹도 하고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아무튼 베를린 시민 전체가 거리로 몰려 나온 듯했지요. 그들은 모두 동베를린 쪽으로 향한 도로를 향해서 한 방향으로 바삐 걷고 있었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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