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8)

  • 입력 1999년 12월 28일 13시 56분


우리는 떠들썩하면서 차림표에 나온 음식들을 시키고 내오는 순서까지 말해 주고는 소주부터 시작을 했어요. 수출용은 돗수가 조금 낮아서 어딘가 싱겁고 물 탄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비행기로 실어오는 팩 소주가 서울 맛이었지요. 신씨 부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배를 건네고 다시 왁자지껄.

너 논문 거의 다 됐냐?

지금도 자료 뒤지고 있어요.

이 이는 아직두 문턱이예요. 벌써 이 년 넘도록 그 모양이야.

학위 때려 치우지 그래.

무슨 그런 절망적인 말씀을. 한국 가서 뭐 해먹구 살라구요. 나는 교수 부인 노릇이라두 해보구 아줌마가 되어야 할 거 아녜요.

기왕 다 늙었는데 뭘 그래요.

하긴 폭 삭았어.

정말 지금이라두 때려 치우고 돌아가고 싶어요.

본심인 모양인데?

서양 놈들 신세 지기도 싫고 돌아가서 할 일도 많아요.

자네 이른바 운동권이었지?

이 선생의 물음에 부인이 대신 답했어요.

팔십 년대에 운동권 아닌 학생이 어딨어요? 이 이는 친구들 보기가 부담스럽대나 뭐래나 쓸데없는 자의식에 빠져 있다구요.

당신은 좀 빠져 봐. 감옥 간 애들이 눈에 밟혀요. 내가 떠날 때만 해두 현장 들어가구 감옥에 가구 했던 애들이 절반 이상이었어.

딴 생각말구 자넨 공부를 해야 돼. 더 잘 해 보라구 자네가 뽑힌 거야. 모두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잖아.

우리는 제법 술을 많이 했어요. 나는 그날 송영태의 전화를 받은 직후라 어쩐지 여기가 베를린이 아니라 서울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나는 소주 잔을 들고 잠깐씩 멍하니 신촌이며 신림동 구로동 그리고 인천 부근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저녁 무렵이 지나고 열 시 가까이 되자 식당 안에는 우리말고는 한 테이블에만 손님들이 남아 있었지요. 그들은 창가에 자리 잡은 우리들과는 대각선의 방향에 주방과 가까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요, 거기서 큰 소리가 나기 전에는 누가 앉아 있었는지 바라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쪽에서 누군가가 술병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술, 술 가져와. 이 집 장사 안하나?

우리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어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허름한 합섬 자켓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자가 주정을 시작했어요. 주인은 그를 아는지 그에게로 가서 달래는 거예요.

오늘은 그만해요. 우리두 이젠 끝낼 시간이우.

남자는 여전히 술병으로 탁자를 요란하게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어요.

당신 나 무시하는 거야? 술을 당장 가져오란 말야.

에이 정말…여보쇼, 곁에 계신 양반이 좀 데리구 나가슈.

주인은 그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일행에게 사정조로 말하더군요.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던 이는 술도 덜 취했고 안경 쓴 모습이나 하얀 얼굴이 단정해 보였지요. 그가 사내를 일으켰어요.

자아 선배님 그만 일어나십시다.

사내가 그를 뿌리치며 두 팔을 휘젓고는 의자를 발길로 차서 넘어뜨렸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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