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5)

  • 입력 1999년 11월 7일 20시 05분


제법 너른 방인데 온돌이고 벽에는 조잡한 무늬였지만 벽지도 발랐다. 온돌 바닥에 불을 넣었는지 제법 따뜻하다. 나를 방 안에 밀어 넣고나서 그가 역시 다른 감방과 같은 모양의 철문을 요란하게 닫고는 쇠빗장을 지르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가 복도의 중간에 있는 담당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타소 위탁자 추가 일명이야.

그래도 만기방에 들었는데 어쩐지 타관 객지에 멀리 온 것 같이 낯설고 내 조그만 시멘트의 방이 그리웠다. 나는 이불을 쓰고 누워서 천장의 얼룩진 곰팡이 부분에 새로운 형상을 그려 본다. 벽에 뭔가 적혀 있다. 자세히 보니 석방 날짜와 이름과 한 줄짜리 감상이 적혀 있다. 그런 문장은 벽의 틈틈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저들은 여기 무슨 인간적인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숙아 내일 나는 네게로 간다.

피눈물의 십 삼년.

돌아가신 아버님, 아들은 집으로 갑니다.

교사 박갑준 평생 해처먹어러. 너는 나에 철천지 원수다.

흘러간 내 청춘이여!

후배들아 절대로 죄 짓지마라. 여기는 쓰레기통이다.

돈이 웬수다. 무전유죄.

바다 밑 깊숙히 잠수하는 이들은 수압과 산소에 의한 신체 변화를 조절하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오기 전에 중간 대기실에 머문다고 하던데, 아니면 옛 전설에 나오듯이 저승과 이승 사이에는 망각의 강이나 방이 있어서 그곳을 거쳐 속세로 나오면 모든 지난 일을 잊는다고도 했지. 일반수들은 대개 이곳에서 사흘이나 적어도 이틀은 지내게 된다. 여기는 이미 교도소의 안쪽 담을 벗어난 곳이라서 반쯤은 정신과 몸을 담장 밖으로 내놓고 지내는 셈이다.

그 몇 밤 사이에 석방자는 소에서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게 된다. 아마도 나가서 집에 돌아가 새로운 일상과 부딪치며 일 주일쯤 지나면 그는 끊겼던 몇 년 전의 자신의 과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만 흐르는 물처럼 세상만이 저만큼 지나가 있으며 그가 여기에 지금 내딛고 잠근 두 발이 예전의 그 물인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밤 잠을 설쳤다. 이곳도 날이 새자마자 일과가 빈틈없이 시작되었다. 교대가 오고 나서 나를 데려왔던 담당이 문을 따 주었다. 나는 어제처럼 다시 같은 길을 돌고 돌아서 접견실 건물 쪽으로 갔다. 방 안에 주임과 점퍼는 보이지 않았고 양복만 혼자 앉아 있었다.

아침은 벌써 드셨어?

관식이 나와서….

주임님이 곧 오실 거요. 누가 오 형을 찾아 왔는지 맞춰 보쇼.

나는 누군가 면회를 올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양복이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한 장 썼으면 집에두 보냈을텐데, 이번은 귀휴도 아니고 참관 중에 가족 특별접견은 특혜 중의 특혜야.

가족이라구요?

되묻는데 문이 열리더니 주임이 어제의 사복 차림 그대로 당직계장과 함께 들어섰다. 주임이 갑자기 말을 올리면서 점잖게 말했다.

오 현우씨 누님께서 오셨어요.

그들의 등 뒤에서 문이 조심스럽게 빼꼼히 열리며 누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글: 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