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2)

  • 입력 1999년 11월 3일 20시 03분


종로 거리는 여전히 자동차와 행인으로 붐볐고 나는 아까 대합실에서 보다는 훨씬 보행에 익숙해졌다. 양복이 가서 표를 사왔는데 다음번 상영이 한 시간쯤 남아 있었다.

어때 불백 한번 먹어 봐야지?

주임이 두리번거리면서 건너편 피카디리 극장 골목이며 단성사 골목을 바라보았다.

어디 괜찮은 한식집 있나 찾아 봐라.

저쪽 건너편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들이 이끄는대로 길을 건너 갔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식당은 빈 자리가 별로 많지 않았다. 사실은 소방서 옆에 있던 옛날 중국집을 보면서 자장면이 먹고 싶었지만 불고기라는 말을 듣자 금방 포기해 버렸다. 이상하게도 징역에서건 군대에서건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많아서인지 고급스런 음식은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요리책을 들추며 ‘외식’을 나가는 경우에도 전문 요리가가 만들었을 듯한 음식은 대충대충 넘어가고 식탁도 더러운 중국 만두 집의 장정 주먹만한 고기만두를 생각했다. 털이 그대로 박혀 있는 돼지 비계가 야채 속 사이에서 튀어나오곤 했지. 아니면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나서 둥근 팬에 불길이 솟아 오르도록 돼지고기며 야채를 장과 함께 급하게 볶아대는 소리와 냄새가 풍겨 나오고도 한참만에 나오던 자장면 생각이 간절했다. 운동 시간에 수인들 사이에 먹는 얘기가 나오면 서로 다른 고장과 동네의 자장면 자랑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 일반수 둘이서 음식 얘기를 하다가 탕수육과 잡채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있느냐는 의견 차이로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것도 보았다. 헌데 왜 불고기 생각은 못했던 걸까.

우리 네 사람은 홀을 지나 신발을 벗고 올라앉는 큰 마루의 맨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불고기가 지글대며 익어가기 시작하자 점퍼가 젓가락으로 집어다 내 접시에 얹어 주었다.

야아 징역 좋다 증말….

주임이 옆자리에 슬쩍 눈길을 주고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린 그만 둬. 오 형 많이 들어. 우린 평소에 자주 먹는다구.

나는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부드럽게 씹히면서 마늘 맛과 달착한 양념 맛이 입 안에 가득찬다. 그래 양념을 처음 먹는 것이다. 안에서의 김치는 언제나 소금과 검붉기만 하고 맵지는 않은 고춧가루 뿐이었다.

사회가 좋긴 좋지 머.

양복쟁이가 중얼거린다. 나는 어쩐지 눈알이 맵싸해져서 그들에게 알려질까봐 고개를 숙인다. 젓가락질을 그치고 앉았더니 주임이 묻는다.

왜 그래, 식성에 안맞어?

아뇨…좀 매워서.

그럴 거야. 오랜만일테니까. 그러구 말야 술두 한 잔 해야지. 뭘 좋아해. 소주 아니면 맥주?

맥주가 좋겠군요.

그가 맥주를 시킨다. 차갑게 식힌 맥주가 나오고 거품이 찰찰 넘치도록 따른 잔이 내 앞에 놓인다.

자아, 축하합니다아.

점퍼가 내 얼굴 앞에 잔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양복이 얼결에 자기도 잔을 쳐들면서 점퍼에게 물었다.

뭐야, 뭘 축하해?

석방을 축하한다. 이건 연습이지만 말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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