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만나는 고구려]<4>시루

  • 입력 2005년 5월 4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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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나온 시루. 고구려 중기 시루의 대표적인 형태다. 사진 제공 고려대박물관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나온 시루. 고구려 중기 시루의 대표적인 형태다. 사진 제공 고려대박물관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는 고구려 여인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부뚜막에 놓인 큰 시루가 등장한다. 한 여인이 오른손에는 주걱을, 왼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있다. 시루에 물을 축여가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이 익었는지 찔러보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번 고려대의 ‘고구려 특별전’에 온 시루는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출토됐으며 4세기 말∼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악 3호 무덤 벽화에 나오는 시루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입구 쪽이 넓고 몸체의 윗부분에서 배부르다가 점차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진다. 몸체 좌우에는 2개의 띠고리 손잡이가 달려 있고 바닥에는 37개의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그릇 겉면은 윤기가 도는 검은 회색이다.

이 유물은 고구려 중기 시루의 대표적 형태다. 고구려 초기 시루는 밑바닥에 작은 구멍 수십 개가 무질서하게 뚫려 있는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구멍의 크기가 커지고 중앙에 하나의 동그란 구멍을 중심으로 주변에 6개 또는 4개의 구멍이 뚫린 형태로 발전해 간다.

이후 6세기 후반쯤에는 주변의 구멍 4개가 타원형으로 변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루와 유사하다. 백제의 시루는 좁고 긴 형태에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 시루 밑바닥의 구멍 형태는 고구려 후기의 것과 비슷하다.

시루는 우리나라 밥 문화의 발달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조리 용구로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루의 등장은 곡식 농사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볼 수 있다.

▽도움말 주신 분=박순발(朴淳發) 충남대 교수, 최종택(崔鍾澤) 고려대 교수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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