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도시를 바꾼다]<1>움직이는 디자인

  • 입력 2004년 5월 3일 19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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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분야의 디자인은 사치인가?”

최근 논란 끝에 폐기된 자동차 번호판에서부터 거리의 각종 구조물과 간판, 관공서의 로고와 서식(書式) 등에 이르기까지 관(官)이 결정 또는 규제 권한을 갖는 이른바 ‘공공디자인’의 황폐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미적 감각은 물론 기능성마저 떨어져 ‘폐해’ 수준에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아일보는 5회에 걸쳐 “세련된 도시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시민들의 욕구가 과연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 짚어 보고 대안을 모색한다.》

수년 전부터 경찰은 건설교통부측에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어 뺑소니 사고가 나도 번호판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건교부는 무지막지하게 글씨체를 키운 새 번호판을 내놓는 것으로 답했다. 주무부서인 자동차관리과는 ‘그림 좀 그린다’는 한 직원에게 “알아보기 쉽게 최대한 글씨를 키우라”고 주문했고, 그가 만든 ‘작품’은 1월 초부터 전국에서 발급되기 시작했다.

▽미적 감각은커녕 기능성도 없다=‘촌스럽다’는 여론의 포화에 밀려 폐기 처분 결정이 내려진 새 자동차 번호판은 기능면에서도 큰 결함을 안고 있었다. 글씨를 키운다고 꼭 잘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 새 번호판은 숫자와 글씨가 번호판 경계에 맞닿아 있어 멀리서 볼 때 간섭 현상으로 ‘2’와 ‘7’이 구분되지 않는 등 가독성(legibility)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건교부로부터 이 ‘새 번호판’을 대신할 ‘다시 새로운 번호판’의 디자인 개발을 의뢰받은 윤종영 한양대 교수(디자인기술공학연구센터장)는 기존의 ‘번호판 제작규정’이 자의적인 변형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대략적인 글씨체와 글씨의 두께에 대한 지침만 있을 뿐 가령 ‘ㄱ’을 쓸 때 가로 세로 획의 각도 등이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같은 번호판이지만 200여개 제작업체마다 글씨체가 제각각이었다.

7월 1일 발표 예정으로 번호판의 디자인 작업을 진행 중인 윤 교수는 “일본과 우리나라만 채택하고 있는 현재의 2열식 표기를 미국 유럽 중국과 같은 1열식 표기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또 글씨체와 여백을 적절히 조정해 가독성도 높이고 바탕은 흰색이나 노랑, 글씨는 검정 파랑 빨강 등을 쓸 계획이다. 번호판의 가로 길이는 늘리고 세로 길이는 줄이며, 번호판 왼쪽 부분엔 해당 차량의 용도를 상징하는 무늬도 넣을 예정이다.

30년 전에 채택된 현 번호판의 규격은 세로가 너무 길어 요즘 날렵하게 디자인되고 있는 자동차 앞 범퍼에서 공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등 기능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게 윤 교수의 지적이다.

▽관(官)의 무감각이 졸작을 낳는다=이런 디자인 감각은 교통 분야만 해도 지하철, 시내버스, 경찰차, 청소차, 택시 등에도 필수적이다. 특히 공공차량은 ‘움직이는 디자인 전시장’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미감을 고려하면서도 해당 기관 또는 단체의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이에 관한 한 우리는 지금까지 완전 무감각이었다.

지금 서울 거리를 달리고 있는 8000여대의 시내버스는 그야말로 ‘개성 없는 서울’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간선도로에는 주황과 분홍색의 일반시내버스 뒤로 베이지색과 녹색의 칙칙한 좌석버스, 그 옆으로 굵은 빨강과 파랑 줄 위에 노선번호가 쓰인 고급좌석버스가 달리고 있다. 좁은 뒷길은 사업자 마음대로 칠한 마을버스들 차지다.

경찰차, 청소차 등은 과거에 입혀진 권위주의적, 행정편의적 색상을 벗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 조직이 디자인을 아예 무시하거나 전문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를 고식적인 관료 감각으로 ‘필터링’하다 보니 도시가 칙칙한 색으로 뒤덮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차량 번호판의 경우에서 보듯 디자인에 대한 시민의 요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료사회도 이제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7월 1일 선보이는 서울시의 새 시내버스 운영체계는 ‘디자인’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사례로 꼽힐 만하다.

서울시 ‘마케팅기획팀’과 디자인 전문업체 브랜드웍스의 합작품인 이 시내버스 디자인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것. 이들은 일반 순환 고급좌석 보통좌석 마을버스 등 기존 5개 노선체계를 간선, 지선, 광역, 순환 등 4가지로 단순화하고 그 각각에 ‘파랑(B)’ ‘녹색(G)’ ‘빨강(R)’ ‘노랑(Y)’의 색상과 명칭을 부여했다. 정류장 시설도 새 디자인 원칙에 따라 모두 바뀌게 된다.

지난해 6월 최종안이 나온 뒤 일부 공무원들로부터 “너무 튄다”는 등의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서울시는 원안을 밀어붙였다. 브랜드웍스 이정아 이사는 “담당 공무원의 전향적인 마케팅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평가했다.

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디자인의 발주자가 디자인의 모든 내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자동차 번호판 논란’과 같은 촌스러운 사고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 도시환경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주황 분홍 파랑 빨강, 그리고 사업자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칠하고 다녀온 서울의 시내버스(맨 왼쪽)와 좌석 마을버스 등이 7월부터 R(레드) B(블루) G(그린) Y(옐로) 등 4개 체계(왼쪽 두 번째부터)로 개념과 디자인이 정리된다. R은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급행, B는 시내에서 먼 거리를 운행하는 간선, G는 마을버스 격인 지선, Y는 도심을 도는 셔틀 노선이다. 이미 시내를 달리고 있는 새 디자인의 버스는 새로 칠할 때가 된 노후차량과 최근 출고된 새 차들이다. 서울시는 6월30일까지 모든 버스에 새 디자인을 적용할 계획이다.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한때 “알아보기 힘든 영어 철자 대신 ‘급행’ ‘지선’ ‘간선’ 등을 차량 외부에 표시하자”는 의견이 일기도 했다. -사진제공 브랜드웍스

▼서울시 겨우 6000만원 주면서 “노선 디자인 바꿔라”

브랜드웍스가 서울시 버스 이미지통합 작업비용으로 받은 액수는 6000만원. 브랜드웍스는 지난해 3월 말부터 6월까지 사장 지휘 아래 기획팀 3명, 디자이너 5명 등 모두 9명이 달려들어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끝에 작업을 마쳤다. 6000만원은 조사비 및 재료비는 고사하고 이들 9명의 3개월치 임금에도 모자란다.

공공디자인에 지출되는 비용은 이렇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 ‘공공디자인을 맡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브랜드웍스 이정아 이사는 “서울의 얼굴을 만드는 일이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언제까지나 통할 수는 없다. 또 대부분의 공공디자인은 시내버스나 차량번호판처럼 ‘생색나는 큰 사업’도 아니어서 ‘돈보다 명예’를 택하라고 요구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공공기관들은 디자인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각종 팸플릿 안내문 안내판 등의 제작은 입찰을 통해 전문업체에 맡겨진다. 그러나 이때 지급하는 비용에는 ‘기획비’ ‘디자인비’ 등의 항목이 아예 없다. 디자인은 최종제품에 딸린 부속물일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그래서 독자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인쇄업자나 간판 제작업자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디자인 비용을 잘게 나눠 다른 항목에 끼워 넣는 실정이다.

건설교통부가 자동차 번호판을 다시 디자인하기 위해 윤종영 교수팀에 지급한 비용은 5000만원으로 업계 관행에서는 ‘상당한 편’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현재의 관공서 일처리 시스템에서 디자이너의 자존심은 설 땅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산을 아낀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공디자인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이 인쇄업자와 간판업자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상황 역시 비정상적인 것은 분명하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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