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 일본 총리관저와 국회의사당이 있는 ‘정치 1번지’ 도쿄 나가타(永田)정에는 연일 수만 명이 모여 시위를 했다. 당시 쟁점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한 11개 안보 관련 법안(소위 ‘안보법’)의 제정 및 개정 문제였다. 집단적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미국 등 밀접한 제3국이 공격을 받으면 일본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다. 시위대는 일본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돌아가려고 한다며 법안을 밀어붙이는 집권 자민당에 결사반대를 외치고 ‘평화정신’을 강조했다.
시위대들이 외친 구호 중에는 ‘무기 수출 3원칙 복구’도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2014년 4월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을 각의(국무회의)에서 결정하고 기존 ‘무기 수출 3원칙’을 대체했다. 그때부터 무기 수출은 원칙적 ‘금지’에서 ‘허용’으로 바뀌었다. 그런 마당에 집단적 자위권까지 도입하려 하니 일본 국민들의 불안이 커진 것이다. 아베 정권은 2015년 9월 안보법을 모두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이달 20일 일본은 세계 최대 무기전시회를 거리낌 없이 개최하는 나라가 됐다. 일본의 평화정신과도 맞닿아 있는 안보법이 통과된 뒤로 4년, ‘무기 수출 3원칙’이 폐지된 지 5년이 넘게 지난 현재의 일본 모습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 비즈니스맨 만난 자위대 전차
20일 일본 지바현에 있는 대형 전시장인 마쿠하리멧세에서 열린 ‘DSEI(Defence &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 저팬’ 행사장. 대형 일장기 아래 육상자위대의 10식 전차가 보였다.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맨들이 연신 전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영어를 구사하던 한 비즈니스맨은 일본이 만든 수륙양용 구명비행정 US-2에 관심을 보이며 ‘모두 일본 부품으로 만들었느냐’ 등을 물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상자위관이 “100% 일본 부품은 아니다”라면서도 “수색과 구조에 탁월한 성능을 보인다”고 설명하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번 전시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154개 기업이 참여했다. 전차와 최신 기관총, 야간투시경, 가상현실(VR)을 활용한 전투훈련 소프트웨어 등 첨단 무기 관련 제품이 전시됐다. 드론 방지 시스템, 수중탐사로봇 등 보안 분야 제품도 눈에 띄었다.
미국 최대 방산기업인 록히드마틴은 자사의 전투기 모형을 전시했다. 전시를 안내하던 관계자는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다. 일본은 매우 중요한 고객”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에 본사를 둔 전차 제조사 패트리아 관계자는 “지난해 일본 방위성이 처음으로 바퀴가 8개인 8×8 방식의 전차에 대해 공개경쟁 입찰공고를 했다. 패트리아는 최종 톱 3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동맹인 미국에서 주로 무기를 구매했는데 공개경쟁 입찰을 진행한 것은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을 사겠다는 의미”라며 “일본 시장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했다.
미쓰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IHI 등 일본 기업 61개사도 참여했다. 전시회장 한쪽 벽면을 일본 대기업들이 대부분 차지했다. 기뢰 수색 등에 활용하는 수중용 로봇을 전시한 IHI 관계자는 “올해 처음 참가했다. 많은 비즈니스맨들에게 회사를 알릴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맨뿐 아니라 훈장을 단 제복을 입은 군인들도 많았다.
DSEI는 영국 런던에서 2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방위 및 안보장비 전시회다. 이 행사가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도입 이후 일본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가 방산 분야에서 일본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DSEI를 유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시회 후원 명단에 일본 외무성도 포함됐다.
DSEI 저팬 실행위원장을 맡은 니시 마사노리(西正典) 전 방위성 사무차관은 18일 전시회 개막식 인사말에서 “일본 국내외 기업들이 모여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드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행사”라고 했다. 도쿄신문은 “아베 정권이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을 도입하면서 공개적으로 무기 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 “죽음의 상인, 물러가라”
무기 전시장에서 도보로 5분 떨어진 JR가이힌마쿠하리(海濱幕張)역. 시민 40여 명이 모여 “무기 판매상은 물러가라” “마쿠하리멧세는 무기전시회를 더 이상 열지 말라”고 외쳤다.
시민단체 ‘안보관련법에 반대하는 엄마의 모임@지바’의 회원인 가나미쓰 리에(金光理惠) 씨는 “일본은 전쟁 이후 평화헌법을 만들었다. 평화주의 정신에 비춰볼 때 어떤 무기 매매도 일본 국내에서 이뤄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DSEI 저팬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팔기 위한 것이다. ‘죽음의 상인’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방산 관련 전시회는 한국 미국 등 전 세계에서도 열리는 행사다. 다만 일본에선 다른 나라에서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선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연다. DSEI 저팬은 18∼20일 열렸는데 첫날인 18일에는 400여 명이 몰려 반대 시위를 했다. 인터넷을 통해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한다.
일본 시민단체인 ‘무기거래반대 네트워크’는 전시회 개최에 앞서 지난달 31일 도쿄에서 130명의 학자, 언론인, 시민이 참석한 공동성명을 내고 “헌법 9조가 있는 일본 정부는 무기 거래가 중단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특징은 일본 언론의 표현 방식이다. 일본 언론들은 DSEI 저팬을 설명하며 ‘무기 견본시장’이라고 보도했다. 견본시장이란 견본을 소개하는 박람회 성격의 행사라는 뜻이다. DSEI라는 용어 자체가 가진 방위(Defence) 및 안보장비(Security Equipment)라는 의미보다는 ‘무기 소개’에 더 방점을 둔 것이다. 방위산업 자체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이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을 감안한 접근법이다.
○ 족쇄 풀린 무기 수출
1967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총리는 국회 대정부질의 과정에서 ‘무기 수출 3원칙’을 밝혔다. 따로 법이나 규칙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무기 수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해석을 설명한 것이다. 1976년에는 무기 수출 자제 대상이 사실상 모든 국가로 확대됐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무기 수출 금지 원칙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내각은 미국에 대한 무기 기술 제공을 무기 수출 3원칙의 ‘예외’로 인정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예외가 늘면서 무기 수출 3원칙은 계속 완화됐다.
아베 내각은 2014년 4월 ‘무기 수출 3원칙’을 47년 만에 전격 폐지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명분으로 한 아베 정권의 무기 수출 3원칙 폐지는 중국 군사력 강화에 맞서는 한편 일본 방위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 것이다. 미국은 즉각 환영했고 일본 방산업체들도 내심 반겼다.
하지만 5년간 일본 방위 장비의 완성품 수출 실적은 아직 ‘제로(0)’다. 미국 영국 등과 공동 개발을 추진하고 10여 건의 수출 교섭을 벌였지만 계약을 체결한 곳은 없다. 해상자위대의 US-2는 인도와 5년째 교섭 중이지만 아직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인도는 1기에 100억 엔(약 1080억 원)이 넘는 가격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인도 내부에서의 생산과 기술이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가 문제다. 일본은 갈수록 무기전시회를 더 자주 열고 민관 합동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할 계획이다. 2차 아베 정권이 출범한 2012년 이후 방위예산은 꾸준히 증가했다. 일본 방위성은 2020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 방위예산을 전년보다 1.2% 늘어난 5조3223억 엔(약 57조 원)으로 청구했다. 확정된다면 사상 최대다. 국내총생산(GDP)의 1% 미만인 일본의 방위비는 2.6%에 이르는 한국의 국방예산보다 이미 많은 상태다. 일본 시민뿐 아니라 이웃 국가들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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