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의 뉴스룸]북유럽st의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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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모바일 쇼핑을 하다 희귀한 아이템을 발견했다. 주인공은 ‘북유럽 수세미’. 북유럽 스타일이 대세인 건 알겠는데, 과연 수세미가 북유럽적이란 건 어떻다는 것일까. 내친김에 찾아보니 북유럽 행주, 기저귀, 전동칫솔도 있었다. 북유럽과 상관없어 보이는 물건에도 청어나 부엉이 패턴이 입혀져 있다는 이유로 ‘노르딕’ ‘스칸디’ 등의 수식어가 등장했다. 이러다 변기 솔도 북유럽풍이라고 하겠네 싶어 찾아보니, 정말로 그런 제품도 있었다.

북유럽 아니면 장사가 안 되는 시대다. 포털 메인 화면에는 ‘북유럽 스타일로 꾸민 25평 신혼집’ 부류의 포스팅이 자주 걸린다. 그만큼 관심이 많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대개 리모델링 전후 사진이 함께 올라오는데, 많은 사람이 원래 있던 체리색 몰딩이나 꽃무늬 벽지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 옥색 시트지가 발린 싱크대는 거의 재앙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 소파와 TV를 배치한 전형적인 한국식 아파트에서 몰딩과 벽 색깔만 하얗게 바꾸면 그게 정말 북유럽 스타일이 되는 것일까. ‘끔찍한 체리색 집’을 고친 뒤 북유럽풍으로 꾸몄다는 인테리어는 예쁘긴 해도 북유럽적이라 하긴 어색하다. 이케아 6단 서랍장부터 국민 현관등, 몬스테라 화병까지 북유럽을 표방한 소품들이 집집마다 똑같이 놓여 있어서 오히려 몰개성적인 인상을 준다.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북유럽 디자인은 인테리어, 건축 등에서 세계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이케아나 H&M, 레고 같은 북유럽 브랜드는 국경을 초월해 소비된다. 북유럽 스타일은 모던함의 대명사이며 자연친화적이고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은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아무 데나 북유럽을 갖다 붙이는 지금 한국의 북유럽 열풍엔 좀 유별난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란 단어가 몇 년간 반복되며 식상하단 느낌이 슬슬 들자 최근엔 ‘휘게(Hygge) 라이프스타일’이란 용어가 나왔다. 북유럽 사람들처럼 소박함,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라는데, 정확히 번역되는 한국어도 없는 이 낯선 덴마크어가 올해 최신 트렌드로 꼽힌다. 아니나 다를까 ‘휘게 라이프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다’는 아파트 분양광고와 ‘휘게식’임을 강조한 마사지 오일 따위가 정신없이 쏟아진다.

패션에서 ‘st’는 카피본을 가리키는 속칭으로 쓰이는데 요즘 북유럽 현상은 ‘st’와 많이 닮았다. 카피 제품들은 이자벨 마랑의 블라우스를 베낀 뒤에 ‘이자벨 마랑 st’라며 판매한다. 본질은 짝퉁인데 ‘그런 스타일’이라고 우아하게 돌려 말한다. 도 넘은 북유럽 마케팅에도 진짜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슬쩍 흉내 낸 ‘북유럽st’만 보인다.

좀 더 걱정스러운 건, 이 요란한 마케팅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엔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에 대한 불만처럼 지금 우리 것에 대한 거부감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대척점에 북유럽을 두고 이상적 탈출구로 간주한다. 몇 년째 트렌드 최전선을 지키는 이른바 ‘북유럽 스타일’이 마냥 편치만은 않은 이유다. 본질은 흐려지고 획일화된 유행과 맹목적인 동경만 도드라진다. 지금 한국의 북유럽은 북유럽식 주방 매트와 먼지떨이로만 존재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teller@donga.com
#모바일 쇼핑#북유럽 수세미#북유럽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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