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한예종을 위하여

  • 입력 2009년 5월 21일 20시 03분


음악인 정명화 경화 명훈 세 남매의 성공 스토리는 1960, 70년대 부모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 남매는 세계의 벽이 까마득히 높던 시절 국제적인 콩쿠르에서 입상의 쾌거를 타전했다. 셋 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다녔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부모들도 제2의 정명훈을 만들기 위해 외국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실기(實技)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하는데 한국에선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입시 의혹, 지시 거부에 이념까지

1990년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이어령 씨는 국내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를 키울 수 있는 학교를 구상했다. 그 결과로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개교했다. 예술 관련 학과를 갖고 있는 일반 대학들은 반발했다. 나름대로 예술인을 열심히 육성했다고 자부하던 일반 대학들은 무시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예종은 실기학교로 차별성을 갖는 것으로 논란이 일단 정리됐다.

한예종의 정체성이 다시 문화계 쟁점으로 떠올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을 대상으로 감사를 벌인 뒤 황지우 총장에 대한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구했다. 황 총장은 ‘표적 감사’라며 사표를 냈다. 진보 진영은 ‘진보 성향 교수에 대한 탄압’이라며 반발한다. 이번에는 예술교육의 시스템 문제에 이념과 정치적 요소가 더해져 복잡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황 총장의 잘못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영수증 처리가 미숙해 공금 횡령으로 오인받았고, 해외여행을 갔을 때 문화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며 중징계를 받을 사안은 아니라고 한다. 문화부의 설명은 그의 해명과 배치된다. 더욱이 황 총장은 아들의 한예종 입학과 관련해서도 의혹을 받고 있다. 그의 아들은 한예종에 응시해 4차례 불합격됐다가 한예종이 채점위원 4명 가운데 2명을 교체한 뒤 합격했다. 새 채점위원 중에는 노무현 정부의 첫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씨가 들어 있다. 누가 보아도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한예종의 입시 관리는 모럴 해저드의 전형이다. 이 학교 교수 자녀가 입학한 사례가 지난 9년 동안 25명이나 됐다. 몇몇 교수는 자녀가 응시한 시험에 출제 및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다. 지방 콩쿠르에서도 심사위원들은 출전자 가운데 제자가 나오면 평가에서 배제된다. 심사의 공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국립학교의 입시가 엉망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지난해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이 학교의 통섭교육 과정이 실기 중심의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사업 중지를 지시했다. 3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사업이었다. 황 총장은 거부했다. 그러면서 예술 실기와 무관한 진보 논객 진중권 씨를 객원교수로 영입해 1년 동안 3470만 원을 지불했다. 그는 한 시간 강의에 117만 원을 받은 셈이다. 한때 이 학교에서 강의했던 ‘명강사’ 도올 김용옥 씨는 시간당 강의료로 2만5000원을 받아갔다.

‘實技예술학교’ 정체성 회복을

한예종은 갑자기 이론 교육을 강조했다. 지난 정권 때 시민단체이면서도 정부의 문화행정을 좌지우지했던 ‘문화연대’에 소속된 이 학교 인사들이 이론 교육을 이끌었다. 연구원도 이들의 제자 위주로 채용됐다. ‘실기 학교’라는 한예종의 정체성은 더 흐려지고 ‘진보 문화권력의 온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한예종은 연간 300억 원의 국민 세금을 쓰면서도 누구의 지시와 감독이 통하지 않는 ‘못 말리는 학교’였다. 민주당은 ‘정부가 대학 자율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했지만 학교가 멋대로 하는 것을 놓고 자율을 들먹여서는 안된다. 한예종을 이념에서 독립시켜 ‘순수예술학교’라는 원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를 키우고 국제적인 무용가를 만드는 데 이념이 왜 필요한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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