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국가 원수'라는 자리

  • 입력 2004년 2월 11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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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의 후임으로 1974년부터 76년까지 백악관의 주인이 된, 말하자면 ‘보궐(補闕) 대통령’이었다. 사실 포드가 유고시에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직에 오른 것도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임자 스피로 애그뉴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임한 자리를 메운, 역시 ‘보궐직’이었다.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다는, 정통성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자 포드는 전임자 닉슨의 ‘미국을 상대로 저지른 모든 잘못’을 의회와 여론의 거센 항의와 압력 속에서도 사면해 버렸다.

▼國憲수호 국가통합의 상징 ▼

“원, 세상에…. 저리도 통이 클 수가!”하고 놀란 사람들 가운데엔 당시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도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한 정치가의 참된 용기가 예외적인 상황에서 입증된 세 가지 경우를 들고 있다. 바르샤바 유대인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자서전에서 변명 대신 베트남전의 모든 과오와 죄를 진솔하게 고백한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 국방장관, 그리고 포드의 닉슨 사면…. 대통령이라는 합중국 최고의 요직이 남루한 몰골로 전락해 더 이상 국민의 신뢰 상실로 이어지는 것을 막은 것은 포드의 ‘스테이츠맨’다운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나라를 안팎으로 대표하는 국가의 원수이자 국헌을 수호하는 국가 통합의 상징이다. 그러한 대통령 자리에 전 국민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이 추대된다는 것은 국리민복이라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국가의 원수가 국민을 분열시키고 상당수의 국민으로부터 의혹과 불신, 심지어 모멸을 받고 있다면 그건 국가의 불운이자 국민의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현대사는 이 두 경우를 범례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제1공화국, 소위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통령에게는 막강한 헌법적 지위가 부여돼 있었다. ‘대리황제(代理皇帝)’라고도 일컬어졌던 바이마르공화국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그럼으로써 의회로부터 독립한 민주적 정통성을 갖는 7년 임기의 국가원수였다. 그는 군의 통수권자요, 총리의 지명권과 의회의 해산권을 가질 뿐 아니라 비상시 긴급명령을 발포할 권한도 갖고 있었다. 사회민주당 출신의 겸손한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후임으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이 막강한 자리에 등극하자 대통령이 의회를 무시하고 긴급명령을 남발하면서 마침내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함으로써 바이마르공화국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고 말았다.

히틀러 전쟁의 패전 후 1949년 새로 출발한 독일의 제2공화국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의도적으로 연방대통령의 권한을 축소 약화시켰다. 선출 절차도 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니라 연방의회 의원과 연방 각주의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연방회의에서의 간접선거다.

국가 통합을 상징하는 국가원수를 간접선거로 선출한다는 것은 ‘역사의 지혜’라 생각된다. 좌우 어느 정당에서 대통령이 선출되건 독일 제2공화국의 역대 대통령은 하나같이 내외의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기에 부러울 따름이다.

▼‘대통령의 권한’ 독일의 교훈 ▼

선거전에는 양반이 없다.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제왕적’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는 대통령(무)책임제 하에서 국가원수를 직선으로 뽑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전쟁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말처럼 ‘승리 외엔 어떤 대안도 없는’ 진흙탕의 극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투사도, 인권변호사도, 대쪽같은 법관도 이러한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고 성할 사람은 없다.

그뿐 아니라 용케 선거는 치렀다손 치더라도 제왕적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성하게 물러난 사람조차 없다. 그러한 대통령제도를 우리는 1948년 이후 50년 이상을 지탱하고 있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 14년의 경험에서 이미 교훈을 얻고 있었는데도….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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