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민노당 앞날을 주목한다

  • 입력 2004년 1월 28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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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을 좋아한다. 내가 이 정당을 ‘몸으로’ 만난 것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현장에서였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그 해 가을 총선에서 85세의 노(老)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겨루게 된 47세의 빌리 브란트. 사민당을 상징하는 브란트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나는 그의 인품과 말에 매료돼 버렸다.

히틀러 집권 후 할리우드로 망명한 세기의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던 평생의 고집을 접고 베를린을 찾았던 것도 브란트에 매료된 때문이라는 고백이었다. 한번 들으면 영 잊을 수 없는 굵직한 허스키로 브란트가 사자후(獅子吼)하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것 같다’고 그의 라이벌이자 후계자인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도 적고 있다.

▼공산당과 싸워온 獨 사민당 ▼

장벽으로 시가(市街)가 하루아침에 두 동강이 난 서베를린 시장 브란트의 화해할 수 없는 적수는 동베를린의 공산당 집권자 울브리히트. 한국의 광복 공간에서는 온건 사회주의자로부터 급진 공산주의자까지 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해 초록이 동색이 돼 버렸으나, 전후 독일에서 서독 사민당은 공산당의 합당 제의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공산당과 싸우며 근로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해 왔다. 브란트의 사민당에는 제제다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가령 베를린 시정부의 문화부 장관 아돌프 아른트.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대 총장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장차 이 아이가 사민당원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다는 그는 당내 최고 법률가이자 프랑스 시문학의 번역자이기도했다.

또는 국회 부의장과 프랑크푸르트대 교수를 겸직하고 있던 카를 슈미트 박사. 보들레르와 발레리 시집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던 슈미트는 체격이 우람해서 브란트는 그를 ‘몬테카를로(카를로 산)’라고 부르곤 했다. 반년도 못 가 의회를 해산하고 새 정권이 들어섰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정정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후임 총리를 선출할 연립 다수파가 형성될 때에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이른바 ‘건설적 불신임안’ 제도를 창안해서 전후 서독의 내각책임제 정부를 탄탄한 토대 위에 안정시킨 것도 제헌국회 부의장 ‘몬테카를로’ 슈미트 교수의 태산 같은 공적이다.

그 밖에도 사민당의 국방문제 전문가로 드골과 아데나워에 맞서 대미 협조를 강조한 대서양동맹파 프리츠 엘러, 카라얀 에센바흐와 피아노 3중주곡 음반을 낸 국제경제통 헬무트 슈미트, 브란트에 못지않게 브란트의 생각을 표현했던 에곤 바 등 참으로 인재가 많았다.

물론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19세기 노동운동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양당은 형제당인가? ‘그렇다’고 전후 서독 사민당을 재건한 쿠르트 슈마허는 대답한다. ‘카인과 아벨도 형제라는 의미에서!’다. 그 뒤 독일 공산당은 역사의 대과거(大過去)가 되어 무대 뒤로 사라졌고 사민당은 유럽대륙 최고(最古)의 정당으로 150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올 4월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 여부가 주목된다. 권영길 대표는 17대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15석을 확보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키도 훤칠한 권 대표는 지난 대선에도 출마해 TV토론을 통해 정치적 유행어를 만들어 내는 레토릭과 위트를 과시해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국립대 출신으로 신문사의 유럽특파원을 지낸 경력도 노동현장에서 몸을 일으킨 국내파와는 다른 국제적 시야와 정치적 여유를 기대케 한다.

▼근로자 대변 열린 정책 기대 ▼

민노당에는 내가 좋아하는 박모 영화감독과 같은 예술인, 지식인도 모여들고 있다고 듣는다. 불과 반세기 만에 농업국가를 중화학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한국 산업화의 역군인 2000만 근로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은 나와야 하고 의회에도 진출해야 한다.

노동자를 대량으로 굶겨 죽이고 노동자가 파업도 못하는, 겉만 붉은 독재체제와 친화하는 정당이 ‘진보와 개혁’으로 자타가 착각하고 있는 정치 풍토에, 참으로 노동자의 권익과 그들의 일자리를 생각하는 현대적 노동당, 계몽된 ‘열린’ 노동당의 등장과 성장을 기대해 본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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