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로저 코언]흑백이 함께 부는 부부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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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통계수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무형의 기준도 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같은 숫자는 국민의 애국심이나 낙관주의, 정체성 같은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다.

나는 한때 남아공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서 상상력을 키웠다. 아보카도 나무가 가득 심어진,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는 햇살 가득한 정원 사이로 누더기를 걸친 흑인이 경찰에 떼밀려 가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정책)는 ‘흑인에 대한 부정’이었다. 흑인의 역동성과 인간다움에 대한 부인(否認)이었다. 흑인 억압이 정당화된 사회에서 대다수 사회구성원인 흑인은 나무를 자르고 물을 길어올 때나 필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심지어 흑백 간 성교마저 범죄로 취급됐다. 유혈사태에 대한 얘기는 잡담의 소재가 아니라 사회에 실재하는 망령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남아공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포츠 경기를 개최하는 나라가 됐다. 월드컵을 통해 흑인과 백인이 함께 깃발을 흔들며 화합하고, 부부젤라를 불며, ‘바파나 바파나’(남아공 축구대표팀의 애칭)를 외치고 있다.

남아공 축구팀의 실력은 그저 그렇다. 남아공은 아마도 월드컵을 개최하면서도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 특별한 월드컵은 한 나라의 기적적인 치유, 아프리카의 존엄성, 그리고 폭력과 질병의 이미지를 벗고 더 나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대륙임을 확인시켜 주는 정치적인 메시지니까 말이다.

남아공이 엉망이라는 말도 여전히 들린다. 여전히 국민의 60%만이 수세식 변기를 사용한다. 600만 명의 인구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양성 반응자다. 실업률은 25%에 이른다. 30만 명의 사설 경호원과 높은 담장은 그만큼 높은 살인범죄율을 방증한다.

사람들은 금방 생활이 좋아지길 원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기대’다. 반세기 동안 계속된 아파르트헤이트의 잔재를 한 세대에 없앨 수는 없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이 공언한 ‘비(非)인종주의’는 미국에서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더 큰 그림을 본다. 4900만 인구 중 3870만 명이 흑인이고 450만 명이 백인인 이 나라는 짐바브웨나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내부 충돌을 피하고 화합했다. 이런 남아공의 성취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번 주 나는 부부젤라를 불며 자국 팀을 응원하는 남아공 국민과 함께 월드컵 경기를 관람했다. 남아공은 우루과이에 0-3으로 패했지만 관중은 평화적이고 품위 있게 반응했다.

부부젤라를 금지하자는 주장도 있다. 유럽에서는 귀마개가 불티나게 팔린다. 하지만 부부젤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 백인의 전통 스포츠인 럭비는 부부젤라를 꺼렸지만 흑인이 주로 즐기는 축구는 이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흑백 모두가 부부젤라를 분다.

남아공에 사는 먼 친척인 앤드루 레비는 “이곳의 삶이 두렵지 않은 게 바로 기적”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는 “거리에서 흑인과 우호적인 인사를 주고받는다”며 “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지만 이는 흑백갈등이 아니라 빈곤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월드컵이 만들어낸 선의와 단결을 봤을 때 남아공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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