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아베 총리에게 보내는 국제우편

  • 입력 2007년 3월 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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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님, 요즘 국제적으로 번지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얼마나 고심하십니까. 혹시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보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벤저민 잰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날 유대인 할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은 독일인을 증오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런 글도 쓰지 말며 그런 마음조차 갖지 마라.” 의아해하는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독일이 우리의 미래까지 불행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면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는 건설적 다짐이지요.

독일군에 의해 인종청소까지 당한 유대 민족의 한 사람으로 참혹한 과거를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그의 철학을 나는 깊이 존경하며 일제강점기 생활의 고통을 경험한 한국인들도 그것을 본받기를 바라 왔습니다. 증오는 증오의 대상보다 증오하는 주체에게 더 해롭고 증오심에 사로잡힌 국민의 정신 건강만 나빠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미워한다고 해서 한국의 앞날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특히 젊은이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 속에서 성장하면 그들은 마치 분재 소나무처럼 정신적 좀팽이가 되기 쉽고 균형 잡힌 지혜를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그 같은 부정적 사고에서 벗어나 열대우림의 나무들처럼 쭉쭉 뻗어가야 합니다.

증오 버리려는데 왜 또 상처 주나

만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두 나라가 전쟁 전, 혹은 전쟁 중의 적대감과 증오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아마 두 나라는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이 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들 자신을 위해서도 일본에 관대해야 하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해 왔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총리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나는 양 국민 간에 적대감이나 시기심이 아닌 우호와 협력이 두 나라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대해 아소 다로 외상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유감”이라고 말해 한국 국민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 표현은 한국 국민에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재판에서 사건 관계자 47명을 “증거가 불충분하여 객관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며 풀어 주던 히로시마 법정의 판결문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총리께서는 한술 더 떠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나 뒷받침하는 것은 없었다”고 했으니, ‘전장에까지 스스로 찾아간 꼴’이 돼 버린 일본군 위안부들로서는 심각한 모독을 당한 것입니다. ‘백 번 우기면 (진실이) 된다’는 일본 속담을 믿고들 그러는지 모르지만 일본 각료들이 백 번을 우겨도 역사적 사실만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일본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정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시민들이 정치인만 되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협량한 애국주의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일본 속담에 ‘아픈 상처 위에 소금 바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행한 일에 또 나쁜 일을 가한다는 뜻이지요. 이번 일본 각료들의 언행은 한국 국민 처지에서 볼 때 일본의 과거 정치인들이 한국에 입힌 아픈 상처에 그 후배인 현 지도자들이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양국의 친선을 갈망하는 두 나라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美결의안, 日에는 오히려 기회

2002년 월드컵 때 초반에 탈락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공동 주최국에서 한 나라라도 이기기 바란다’며 한국팀을 응원하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 역시 그런 기상을 갖게 되기 바라며 아울러 양국 정치인들도 월드컵 때 일본 젊은이들이 보여 준 크고 넓은 마음으로 한일 관계를 이뤄 가길 희망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이 미 하원의 결의안 추진에 협조한다면 일본에는 이번 일이 세계인의 주목 속에 과오를 인정하고 성숙한 지도자 국가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비록 총리께서는 어제 또다시 ‘결의안이 의결되더라도 사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양국의 미래를 위해 한 번 더 깊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선택하기를 기다려 봅니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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