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권혁범/‘정치 불신’을 넘어서자

  • 입력 2004년 8월 31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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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아우성이다. 갈등과 혼란을 우려하는 ‘우국충정’의 목소리가 높다. 과거사 규명, 국가보안법 개폐, 행정수도 이전, 호주제 등을 놓고 한국 정치는 힘겨루기 중이다. 양쪽 힘이 팽팽해서 쉽게 어느 한쪽으로 결판이 날 것 같지는 않다. 그 향방이야 쉽게 가늠할 수 없겠지만 우려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날로 커지는 정치혐오증이다. 정치를 불신하고 거부하려는 욕망이 커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갈등-대립은 정당정치의 본질▼

한국에서 정치를 찬양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모두들 욕하고 불신한다. 정치인이란 만날 치고받고 싸우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권력만 좇는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치 불신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특히 민주화 이후에 국가를 대신하여 정치적 헤게모니 주력으로 급성장한 일부 언론 등이 정치는 불필요한 소모전이고 갈등만 부추기며 정치인들은 퇴행적인 정쟁과 권력싸움에 눈먼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파했다. 그 과정에서 항상 강조된 것은 국익, 화합, 단결, 통합이고 비난 받은 것은 국론분열, 파벌싸움, 정쟁, 권력욕 등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비판에는 갈등, 대립, 싸움을 본질로 하는 정당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대단히 위험한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들어 있다. 정당간 혹은 정파간의 불가피한 싸움에서 드러나는 차이에 대해 선별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뭉뚱그려 ‘정치인들은 만 날 싸우기만 한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사실 정치 불신은 원래 권위주의 정치시대의 유산이다. 정치를 금했던 독재세력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원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정치를 독재와 동일시하여 정치를 비판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독재체제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반정치 교육’을 통해 ‘온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최선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그것이 유교 전통의 일원주의적 도덕주의와 결합하면서 ‘혼선 분열 갈등 이견’을 뭔가 부정적이고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철권통치가 불가능한 시대,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적 비방조차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당연히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지리멸렬하고 해결되기 어려운 여러 형태의 정치 사회적 싸움을 적절하게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혼란과 대립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선이 여전히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탓이다. 월드컵, 올림픽 응원에서나 가능한 ‘온 국민 하나 되기’를 정치에서도 똑같이 요구하는 순진함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그것은 결국 지루하고 짜증나는 갈등을 일거에 해결해 줄 ‘한방’을 염원하는 위험한 권위주의적 욕망이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퇴행적 향수를 낳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정치 비난하기’를 통해 시장의 원리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위험천만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정치로부터 ‘독립’된 (시장)경제는 혹 재벌을 중심으로, 경제적 강자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

▼싸움없다는건 독재정치 증거▼

정치란 한정된 자원과 권력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일어나는 세력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그 사회적 갈등을 좀 더 합리적 민주적으로 조정하는 게 수준 높은 정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싸우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만약 그게 없다면 그러한 현상은 ‘초정치’ ‘반정치’이며 정치가 제거된 ‘시장 전체주의’이거나 독재정치의 증거일 뿐이다. 물론 물리적 폭력,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는 중상모략, 인권 침해적 언행은 금기다. 정치적 싸움은 언어와 법을 통해, 그러나 대단히 ‘치열하게’ 이뤄져야 한다.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권력주의적 정치지상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하지만 이제 정치에 대한 집요한 부정과 혐오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혼란과 갈등으로 범벅이 되는 정치를 ‘정상’으로 받아들일 때 정치가 살아나고 경제도 제자리를 잡는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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