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국민고통의 2000년

  • 입력 2000년 12월 27일 18시 32분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늘 그러했지만 올해도 역시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새 세기 새 천년대의 첫해라고 해서 상서롭게 여기고 기대를 걸며 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고 힘든 대란과 대란이 이어진 한 해였다. 분단 사상 처음인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청량제였다고 할까. 이 두 경사가 없었다면 2000년은 정녕 국정혼란과 국민고통으로 일관했던 해로 자리매김됐을 것이다.

그저 쉬운 말로 난세라고 느끼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어설픈 의약분업에 따른 혼란이었다. 다섯달 가까이 끌면서 사회 전체를 어지럽게, 짜증나게,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혼란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정부의 갈등 조정 능력은 영점에 가까워,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리고 이 시기엔, 정부는 아예 없어 보일 정도로 무능했다. 분노한 국민의 질타로 그나마 겨우 봉합 국면에 들어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의약파동…금융비리…경제난▼

은행과 금고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금융비리사건이 잇달아 터진 것도 난세의 분위기를 북돋웠다. ‘정현준게이트’와 ‘진승현게이트’가 상징적 사건들로, 진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가려 있다. 권력의 비호가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을 부정이 흐지부지 처리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이 땅에선 아무리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아무리 새 세기 새 천년대라고 해도 지난 시대나 다름없이 법도 정의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구나”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들은 금고라고 하면 모두 부실하다는 인상을 주어 예금자들로 하여금 인출에 나서게 해 수많은 금고들이 줄줄이 파산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금고를 상대했던 많은 서민들이 목숨같은 목돈을 잃고 허둥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국민으로 하여금 난세를 실감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민경제의 큰 동요일 것이다. 경제지표로는 건실해 보인다고 해도, 일반 백성이 몸으로 느끼는 경기와 경제, 이른바 체감 경기와 체감 경제는 가히 살인적이라고 여기저기서 비명이다. 그 비명은 이제 두려움을 강하게 안겨 주는 경기 침체 속에서 또 한 차례의 폭넓은 구조조정의 시기, 즉 실업자 양산의 시기를 맞아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국민을 더욱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그동안 구조조정을 위해 쏟아부은 공적자금이 사실상 밑빠진 독에 부은 물이나 다름없이 허비됐다는 분석이다. 대체로 70조원 가까운 돈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는데도, 이제 또 집어넣어야겠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다. 말이 좋아 공적자금이지 실제로는 국민의 혈세, 또는 미래의 부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조조정을 위한 노사타협이라는 것도 대부분 이면계약설이 뒤따르는 것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하나마나’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나라 살림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래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고 물러간 공직자가 없으니, 국민만 불쌍하다. 대북 협상의 저자세도, 경찰의 인사 파동도, 검찰의 무기력도, 잦은 집단 시위 앞에서의 무원칙한 굴복도, 국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민심의 이반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자 머리를 짜낸 수(手)가 정계 개편이었던 것 같다. 창당된 지 1년도 안된 민주당에 자민련과 한나라당 일부를 합쳐 새 당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속셈은 뻔하다. 곧 새해가 되면 1년 뒤로 닥쳐올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민주당으로는 어려울 것 같으니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통해 돌파구를 열어 보겠다는 정략이다. 여기에 동조하려는 듯한 한나라당 일부 정치인들도 이런 식으로나마 말을 바꿔 타지 않으면 대선에 나설 수 없거나 집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계산 아래,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변신의 길을 찾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재집권욕 버리고 난국 풀어야▼

국정의 일대 혼란으로 민생이 큰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도 정치인들은 오로지 대선과 권력참여에만 관심을 쏟은 채 야합의 길을 찾는 인상을 주는 모습은 건강하지 못하다. 야합이 만들어낸 정당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정치사에서 이미 여러 차례 보지 않았던가. 따라서 청와대와 여당 일각에서 정계개편설을 강력히 부인한 것은 다행이고 당연하다. 옛 시대적, 옛 세기적 야합의 귀신은 2000년과 함께 아예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재집권을 잊어버리고 오늘의 난국을 해결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기 바란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릴 것이다.

<본사편집·논설상임고문>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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