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창의력 축제서도 문제집 매달린 한국학생

  • 입력 2009년 5월 28일 02시 59분


美서 열린 올림피아드서 입시 공부하고 점수 집착
외국 학생엔 ‘신나는 경연’…한국 학생은 ‘가산점 기회’

지난주 ‘국제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가 열린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의 한 호텔. 1층 로비에는 한국 초등학교 3학년 학생 2명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문제집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10쪽 다 안 풀면 수영장에서 못 논다고 그랬어요.” 문제집 표지에는 ‘중1 수학’이라고 씌어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문제집을 펼친 고등학생도 있었다.

한국 팀 중 한 팀의 호텔방에 들어서자 테이블 위로 문제집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문제집에는 엄마가 꼼꼼히 채점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딸과 함께 온 어머니는 “이 대회에 나오면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 셈이기 때문에 문제집이라도 풀라고 할 수밖에 없다”며 “창의력 교육도 중요하지만 절대 입시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캐나다 학생들이 같이 놀자고 호텔방 문을 두드렸지만 아직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한 학생은 어머니의 얼굴만 쳐다봤다.

한국 팀의 미국행을 도운 여행사 직원은 “처음에는 경기도 나쁜데 100명이 넘는 학생이 어떻게 왔을까 궁금했다”며 “알고 보니 목표가 분명했다. 초등학생은 국제중, 중학생은 외국어고, 고등학생은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니까 온 모양”이라고 말했다. 한 지도 교사는 “몇몇 대학에서 이 대회 수상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전형이 있었는데 올해는 ‘자기추천전형’으로 제한돼 오히려 지난해보다 참여자가 줄었다”고 말했다.

공연 준비도 학부모와 교사들의 손을 많이 탔다. 팀 도전과제 C ‘문학의 재구성’ 공연이 펼쳐진 테네시주립대 동문기념관. 한국 어머니가 공연 내용 하나하나를 반복 지도하는 모습을 본 외국인은 “이건 엄마들 대회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 팀 공연이 끝나자 미국 팀 매니저 론다 테일러 씨(38·여)는 “오히려 너무 잘 짜여 있어 순간적인 창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 공연 점수가 발표되자 한국 학생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심사위원회에 항의하러 갔다.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기록이 저조하다며 담배를 피우는 지도 교사도 있었다. 한 교사는 “수상 실적은 승진 가산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세계 대회에 나서는 교사도 많다”고 귀띔했다.

해외 팀 소속으로 온 한국 학생도 많았다. 미국 워싱턴 주에서 온 교포 2세 김혜선 양(12)은 “학교에서 이 대회에 ‘공부벌레들’만 나온다고 하는 친구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걸 꼭 보여주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재 모양으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며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아 보겠느냐”며 웃었다. 3년 전 캐나다에 왔다는 제니퍼 안 양(12)은 “이미 주 대회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아스팔트 위에 마음껏 분필로 그리며 놀 수 있어 너무 신이 난다”고 미소를 지었다.

폭죽에 레이저쇼까지 펼쳐진 화려한 개막식. 다른 나라 학생들이 체육관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소리치고 춤추고 놀고 있을 때 우리 학생들은 멀리 관중석에 앉아 카메라 셔터만 눌러 댔다.

녹스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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