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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5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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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5월 6일. ‘독일 통일의 아버지’ 브란트가 사임하자 ‘양철 북’의 작가는 심히 애통해했다. 독일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선거 팸플릿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브란트의 유세에 발 벗고 뛰어들었던 그라스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 바로 열흘 전, 현직 총리인 브란트의 보좌관 귄터 기욤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동방(東方)정책의 기수로서 두 차례 동서독 정상회담을 이끌며 통독(統獨)의 기틀을 다져온 브란트가 아니었던가. 냉전(冷戰)이 엄연한 시절이었다.
야당은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사민당 내부도 들끓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우파에게는 ‘조국의 배반자’였고, 좌파에게는 ‘사회주의의 배신자’였다. 사임 당시 지지도는 30%대로 추락했다.
기욤은 ‘잠자는 스파이(slee-per)’였다. 사민당의 성실한 당원으로서 오랜 기간 잠복해 있다 브란트의 측근이 된 뒤에야 활동을 개시했다.
‘기욤 사건’은 독일이 통일되고 브란트가 죽은 먼 훗날, ‘베너 스캔들’로 다시 불거진다. 1994년 브란트의 부인은 “기욤 사건은 사민당 내 권력투쟁에 의한 공작”이라는 남편의 유고(遺稿)를 공개했다.
독일 사민당의 또 다른 거물 헤르베르트 베너가 동독공산당 당수 에리히 호네커와 손 잡고 브란트를 총리직에서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너와 호네커는 함께 반(反)나치운동을 벌인 사이였다.
그러나 베너의 부인은 “등에 칼을 꽂았다”며 펄펄 뛰었다.
부인들에 의한 ‘기욤 사건’ 2라운드의 뒷맛은 썼다. 집권 기민당은 “소련 KGB와 동독 슈타지의 대외공작에 놀아난 게 동방정책”이라며 브란트와 베너를 싸잡아 비난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얼마 뒤에는 브란트의 숱한 여성편력에 스파이 기욤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비밀문서가 폭로된다.
브란트 생전에 통일의 길은 험난했고, 통일이 된 뒤에도 그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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