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매거진]홍석천씨 커밍아웃 '박해'를 보며

  • 입력 2001년 1월 16일 13시 43분


페스트의 원인을 알지 못하던 유럽인들은 그 원인을 유태인에게로 돌렸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혐의를 믿게 되었고 곳곳에서 증거가 제출되었다. 그들은 학살되었다.

마쇼의 '박해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르네 지라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모든 문화적, 종교적 활동의 원형에 자리잡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일 것이다.

희생양 찾기, 누군가에게 이 모든 죄악과 참혹의 죄를 추궁하기,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떳떳함을 보증하기. 이 악마적 제의의 역사는 몹시도 장구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또한 항상 새롭다.

게다가 이 박해의 제의는 가장 그럴 듯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공포의 이유와 박해의 정당성에 확신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정말로 공포스럽다.

▼금기의 정치학▼

2000년 한국에서 이 박해의 제의에 올라온 희생양은, 전염병도 아니고 어처구니없게도 사랑 때문에 기소되었다. 홍석천씨의 커밍아웃, 정확히는 언론에 의한 강제적 아우팅을 계기로 동성애는 이제 대중적 수준에서 하나의 의제가 되었는데, 당연히도 이 새로운 제의의 주관자는 현대의 심판관, 즉 언론이다.

그를 아우팅시킨 스포츠지는 엄청난 크기로 “홍석천, 나는 호모다!”를 1면 톱으로 쏘았고, TV 토론에서는 패널들이 격론을 벌였으며 인터넷 게시판들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동성애가 공식화되는 것조차 혐오스러워 하던 의원나리들은 스스로에게 고결한 품위를 부여하면서, 이 ‘정신질환자’의 참고인 출석을 거부했다. 언론은 동성애를 기소하면서 영업에 성공하였지만, 당사자는 생업 정지를 선고받았다.

이 모든 요란법석은 금기가 가진 하나의 기이한 성격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금기를 건드리는 자는 그리하여 스스로 금기가 된다는 사실말이다.

홍석천은 이로써 적어도 우리 사회의 공식적 표면에서 금기가 되었다. 동시에 금기가 가진 그 모든 폭발력으로 인해 혹은 술자리에서, 혹은 게시판에서 위험하지만 흥미로운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로 금기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금기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터부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는 바로 그들의 존재 그 자체가 타인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존재의 존재함 그 자체를 심문하는 모든 종류의 심리상태, 정확히는 존재의 정치학 그 자체를 심문의 자리에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혐오에 떨게 하는지, 그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심문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이성애주의자와의 대화▼

이성애주의자(≠이성애자)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자연의 질서에 기초해야 할 인간사회의 도덕적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이고. 동물들 중에 동성애 하는 족속들을 보았소? 동성애는 금수만도 못한 짓이요.

우리는 에미와 붙어먹는 개를 본다. 많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난교도, 근친상간도 금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 이성애주의자의 자연주의대로라면 난교와 근친상간도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성애주의자는 화를 낸다. 난교나 근친상간은 인간이 동물성을 벗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한 징표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도덕적 질서는 자연의 질서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한 건 당신이 아닌가? 그럼 자연의 질서와 동물성을 구별하는 기준은 도대체 무언가?

이성애주의자가 대답한다. 그건 결국 생식이 아니겠소? 자손을 낳아야 하고, 또 되도록이면 우수한 자손을 낳아서 번식시켜야 한다는. 이제 명쾌해지는군. 동성애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이유는 생식을 거부하기 때문이요. 난교나 근친상간을 부정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수한 자손을 낳아야 한다는 자연의 질서에 결국 더욱 부합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동성애라고 하면 오로지 비역질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이성애주의자들은 다 그런가? 사랑이라고 하면 오로지 침대 위의 일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가? 동성애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생물학도 사랑이라는 인간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성애주의자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당신은 생식의 필연성을 부정할 셈이요?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인류의 멸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주장을 하는 셈이군.

인류의 멸종이라 그거 말 되는 것 같다. 그건 꽤나 심각한 위협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의 생식을 비난한 적도, 억압한 적도 없다.

세상이 온통 동성애자로 가득 차, 몇 안남은 이성애주의자들이 마치 종마라도 된 양 평생을 번식만 하면서 살아야 될 것 같아 걱정스러운 건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토록 멸종이 걱정된다면, 동성애자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선 피임하는 자들, 가족계획하는 자들, 그 모든 자연에 반하는 자들을 비난할 일이다.

이성애주의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어쨌든 동성애가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AIDS를 보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갔소? 에이즈를 발생시키고 전염시킨 것이 동성애자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지.

유감스럽지만, 이 후천성 면역결핍증에 붙었던 이름은 애시당초 에이즈가 아니었다. 인종주의와 네오파시즘에 휩쓸리던 유럽은 이 이름 모를 질병에 아이티인들의 암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있었고, 미국 남부의 흑인 인종차별주의는 이 질병을 깜둥이의 암이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무명의 질병이 에이즈란 과학적 명칭을 얻음과 동시에 동성애자들에게 고유한 도덕적 질병으로 둔갑되었던 까닭은 의학적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80년대 미국, 신보수주의의 광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성애주의자가 여기서 물러날 리가 없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동성애자들이 이 병에 많이 걸린 건 사실이 아니오? 그리고 에이즈가 치명적인 전염병이란 것도 사실이고. 당신이라면 에이즈 환자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고 싶소?

에이즈 환자가 당신에게 그렇게도 위협이 되는가? 알다시피 에이즈는 혈액과 정액을 통해서 감염된다. 당신이 그와 피를 나누든가 섹스를 하든가 하지 않는 이상 에이즈가 옮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실은 당신이 에이즈 환자에게 훨씬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당신을 위해 한 번만 더 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를 한글로 풀어본다. 후천성 면역결핍증이다. 지구상에서 에이즈로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기나 하는가? 한 명도 없다.

그들은 그저 사소한 질병으로, 그 질병들의 합병증으로 죽는다. 면역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들에겐 온몸이 병균 덩어리인 건강한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위협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데, 그들이 당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당신의 차례는 언제인가?▼

그러므로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공포다. 하지만 존재 그 자체가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동성애자들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이 모든 저주의 대상들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부류다.

나공포증(leprosy phobia)이 물러난 자리는 부랑자들이, 실업자들이, 그리고 정신병자들이 이어받았다. 유태인, 아랍인들, 각종의 유색인들이 또 그 뒤를 이어받았다.

아이 잡아먹는다고 저주받던 한센병 환자들의 뒷자리를 부랑자들이 이어받았고, 또 그 뒷자리를 호남인들이, 그 뒷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물려받고 있는 이 땅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이 곳 사람 모두가 ‘현해탄’ 건너 식민지 시절의 본국에서는 혐오의 대상이다.

이 모든 타자의 목록에는 언제나 사회의 소수자들이 오르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말없는 다수’의 지위가 격상된 적은 없다. 희생의 제의에 열광하던 자들은 수시로 변경되는 폭력의 경계선이 행여라도 자신을 심문할까 보아 무의식 속에서 항상 불안하다.

처음에 나찌는 동성애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나찌는 말했다. “이들은 아리아 족의 우수성을 훼손시키는 죄인들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그 다음에는 유태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나찌는 말했다. “유태인들은 만악의 근원이다. 이 종족은 멸절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유태인이 아니라고. 그리고 다음에는? 독일 전체가 감옥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주제 모르고 나서는 까닭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의 특이성을 심문하는 이 존재의 정치학이, 이 동일자의 권력이 언제 나 자신의 존재를 심판할 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경계선의 안쪽에만 있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빼놓고 말하련다.

사람들아, 너무 안심하지 말아라, 내일은 우리 차례가 될 수도 있느니.

조형근/문화연대 편집위원 remineur@chollian.net

(이 글은 월간 문화연대 제 1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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