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2>플라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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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섬 주민, 哲人이 낸 문제 푸느라 전염병 공포도 잊었다

《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

그리스의 대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기원전 387년 ‘아카데미아’를 세우면서 정문에 이렇게 새겼다. 흔히 철학자로 알려진 플라톤이 사실은 인류 수학사의 획을 그은 ‘수학의 원조’였음을 보여주는 면모다. 플라톤이 개설한 아카데미아는 그리스를 지배한 동로마 제국이 서기 529년 칙령으로 ‘철학 강의와 토론’을 금지해 해체될 때까지 900년 이상 고대 그리스 지성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기자가 찾아간 아카데미아의 옛터는 황량하게 방치돼 있었다. 》
그리스 아테네 중심에 설립된 아카데미아의 건물 앞에 플라톤의 조각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 뒤의 입상은 아테네 시 이름의 유래가 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오른쪽 아카데미아 건물 중앙에 그리스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그리스 아테네 중심에 설립된 아카데미아의 건물 앞에 플라톤의 조각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 뒤의 입상은 아테네 시 이름의 유래가 된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오른쪽 아카데미아 건물 중앙에 그리스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아테네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2km 거리에 위치한 저소득층 거주지역인 콜로노스의 한구석에 있는 옛터에는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나무도 없고, 잔디가 없이 흙이 드러난 곳도 많았다. 다만 ‘아카데미아 플라토노스’라는 공원 이름, 이곳을 지나는 왕복 2차로 이름이 ‘플라토노스’라는 점에서 이곳이 아카데미아의 옛터임을 알 수 있었다. 문화공보부의 작은 안내판은 가시나무와 덤불에 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유적 발굴 작업으로 이곳저곳이 파헤쳐진 채 아무런 표시나 보호 담장도 없다. 주민 요르기아 씨(55·여)는 “정치인들이 돈을 다른 데 쓰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며 “간혹 외국 연구자나 언론이 이곳을 찾아올 때는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스 정부는 옛터는 발굴을 위해 놔두고 그 대신 1926년 시내 중심에 ‘아카데미’를 개설해 과학 예술 등의 종합 학술 연구기관으로서 과거 아카데미아를 부활시켰다. 아카데미아 건물 왼쪽 옆 기둥 위에는 아테네 도시 이름이 유래된 지혜의 여신 아테나, 오른쪽에는 태양신 아폴로의 조각상이 우뚝 솟아 있다. 정문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좌우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피타고라스 기하학의 영향을 받기도 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 등 역사에 남을 철학자이자 수학자들을 배출했다. 3단 논법을 편 아리스토텔레스, 최초로 도형의 면적과 체적을 구하려고 했던 에우독소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이집트의 유클리드 등이 아카데미아 출신이다.

아테네대 수학과 스텔리오스 네그리폰티스 명예교수(73)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아의 필수 과목은 기하 산술 천문 음악이었다. 당시에는 수학과 철학의 구분이 없었으며 기하학은 당시 철학의 기초였다”고 말했다. 현대 수학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미국수학회(AMS)의 로고도 아카데미아의 건물 정면을 도안으로 쓰고 있다.

10여 년째 석사과정에서 ‘플라톤과 수학’을 강의하고 있는 네그리폰티스 교수는 “요즘 철학자들은 수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그는 “플라톤 시대 같으면 기초가 없는 상태로 철학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카데미아는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명성을 되찾아 유럽을 거쳐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대학과 연구기관의 이름으로 쓰였다.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은 이곳이 아카데모스라는 영웅의 관할 지역인 데서 유래했다고 ‘아카데미’의 연구원 유지니아 사란티 씨는 설명했다.

플라톤은 수학자이자 ‘국가’ ‘향연’ 등의 저서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이상 국가’ 건설에 골몰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정치 참여 수학자’로서 그의 업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델로스 섬 전염병 퇴치다. 플라톤은 델로스 섬에 전염병이 돌아 큰 혼란이 빚어질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플라톤은 델포이 신탁에서 받은 것이라며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 정육면체 제단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들기 위해 한 변의 길이를 얼마로 해야 하는지 맞히면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숙제를 섬 주민들에게 냈다. 주민들은 문제를 푸느라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잊어 민심은 가라앉았다.

당시 그리스 기하학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문제를 푸는 전통이 있었다. 플라톤이 낸 문제는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푸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20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증명된 그리스의 3대 기하 문제 중 하나였다. 나머지는 임의로 주어진 각을 3등분하기와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 그리기다.

이만근 교수(동양대)는 “플라톤은 전염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민심 악화가 더 큰 문제라고 보고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문제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의 ‘정치가적인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고 말했다.

아테네에서 서북쪽으로 약 180km 거리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맥 중턱에 위치한 델포이에는 요즘도 플라톤이 지목했을 정육면체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폴로 신전은 기원전 5, 6세기에 지어졌다가 산이 무너져 매몰된 후 다시 발견됐으나 정육면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깨알 같은 글씨로 신전의 벽에 새겨진 방대한 신탁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관람객들이 놀란다고 신전 안내인은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도 원래는 이곳 신탁의 한 구절이었다고 한다. 이곳 신전의 한 기둥 끝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우주의 배꼽(중심)’이라고 부른 신비의 돌 ‘옴팔로스’가 있었다. 현재는 신전 옆 ‘델포이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이 활동한 기원전 5, 6세기에 철학과 수학 수준이 정점을 이뤘다. 이는 그리스가 당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할 만큼 국력이 팽창하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기하학이 발전해 온 덕분이었다. 현재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은 기원전 9∼7세기가 그리스에서 ‘기하학의 시대’라며 전용관을 두고 정교한 무늬의 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부관장인 알렉산드라 크리스토풀루 박사는 “발견된 도자기 등 많은 유물 중에 점과 선만을 이용한 높은 기하학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많아 기하학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했다.

플라톤 시대를 전후해 제작돼 그리스에서 발굴되거나 로마에 뺏긴 조각상 중 특히 미완성 작품에는 무릎과 가슴 등에 미세한 구멍이 보인다. 크리스토풀루 부관장은 “이는 조각상의 머리 가슴 다리 등의 크기를 조절하면서 수학적 비례를 맞추기 위해 뚫어 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조각가가 되려면 수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당시 조각가는 수학자였다”고 말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흙은 정육면체, 공기는 정팔면체, 우주는 정다면체” ▼
■ 플라톤의 ‘정다면체 우주 원소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수학은 기하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를 통해 우주를 설명하려 한 초기 철학자이자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플라톤의 입체’라고도 불리는 5가지 정다면체다.

그리스인은 오래전부터 정다면체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5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20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집트의 유클리드가 정리한 ‘기하학 원론’의 465개 정리 중 마지막이 ‘정다면체는 다섯 개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주는 물 불 공기 흙 4개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원소는 정다면체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원소가 정다면체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주는 완벽한 물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플라톤의 독특한 믿음에 따른 것이다. 이 믿음에 따라 플라톤은 날카로운 불의 원소는 정사면체, 가장 안정적인 흙은 정육면체, 유동적이고 쉽게 구를 수 있는 물은 정이십면체, 공기의 원소는 정팔면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가 정다면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행성은 태양 주위로 타원형을 그리며 공전한다’ 등 3가지 행성운행 법칙을 발견한 천재 천체물리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에 의해서도 계승됐다. 그는 우주는 정이십면체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플라톤의 ‘정다면체 우주 원소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우주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원소는 각각의 정다면체를 갖는다는 플라톤과 케플러의 이론은 사실상 수학적으로는 극도로 추상적인 이론이라는 것이 후대 수학계의 평가다. 하지만 자연과 세계 속에서 질서와 규칙을 추구하는 기본 철학이 수학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이만근 교수는 풀이했다.

아테네=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수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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