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체험기) “도시에서 나를 읽다” 템플스테이

  • 입력 2015년 4월 20일 11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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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의 일상을 체험하며 심신의 휴식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일반인들이 사찰 생활을 통해 불교문화를 체험하고 정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예불과 발우공양, 108배, 참선, 스님과의 다담 등이 공통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휴식과 배움을 얻기 위해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도심 속에도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다. 지난 2월 13일, 종로구 구기동 삼각산 자락에 위치한 금선사에 직접 찾아가 맞춤형 템플스테이를 체험했다.

EDITOR 곽은영 PHOTOGRAPHER 김현진 COOPERATION 금선사(02-395-9955)

행복과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교에 구애됨 없이 템플스테이를 배움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맞춤형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2일로 진행되는 템플스테이와는 달리 본인이 원하는 요일과 시간을 정해서 수행할 수 있으므로 소수의 인원으로 깊이 있는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에디터가 금선사에서 체험한 템플스테이는 오전 10시부터 약 한나절 동안 이뤄졌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에 위치한 금선사는 비봉 매표소 앞의 주차장에서부터 등산로를 따라 5~1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데, 도심의 번잡함을 떠나 조용한 산길을 오르는 것에서부터 수행은 시작된다.

금선사의 맞춤형 템플스테이는 담당 팀장의 산사소개와 불교의 기본정신소개, 염주만들기, 108배, 점심공양, 그리고 스님과의 참선과 다담으로 이뤄졌다.


나의 몸과 마음을 바쳐 집중하는 것

금선사의 템플스테이 담당 남석훈 팀장에게 금선사에 대한 소개 및 불교의 기본 정신과 문화를 소개받았다. 사찰 내에서는 인사를 할 때 합장저두(合掌低頭)를 하는데, 합장저두는 말 그대로 두 손바닥을 합하여(합장(合掌))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저두(低頭))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반배라고도 부른다.

합장저두는 길에서 스님이나 다른 불자들을 만났을 때 하는 인사로 합장저두함으로써 본인이 하심(下心,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하고 있다는 것, 수행자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일깨운다. 절이라는 것도 합장과 같이 내 마음을 겸손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절과 반배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행동이다.

“합장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천주교 등 다른 종교에도 있는 행위인데, 손가락을 깍지 끼거나 엄지를 교차시키는 형태를 띱니다. 손바닥을 합친다는 것은 간절함과 몸과 마음을 바치는 집중을 뜻합니다. 예배, 기도, 예불 시에 합장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 집중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오른손은 부처님, 고귀함, 맑음, 깨끗함을 뜻하고 왼손은 더러움, 천민, 노예를 뜻한다. 그리고 합장은 이 상반된 것의 합일을 의미하는데, 각자가 맡은 일이 다를 뿐 존귀함에 있어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바탕인 평등은 ‘나’와 ‘너’ 그리고 ‘사람’과 ‘미물’이 모두 존귀하고 같다는 것을 말한다.

네 마음의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합장저두에 대한 설명 후, 남 팀장과 함께 여러 종과 북이 모여 있는 범종각에 올랐다. 북은 가죽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에게, 물고기 모양의 목어(木魚)는 물속에 있는 생물들에게, 운판(雲板)은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에게, 범종(梵鐘)은 모든 만물과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해주는 소리이다. 모든 종과 북에 의미가 있지만, 특히 목어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에 게으른 스님이 살았는데, 그 스님이 너무 게으른 나머지 스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일찍 죽게 돼요. 그 후 슬픔에 빠진 스승이 배를 타고 큰 강을 건너다가 어떤 물고기의 등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게 돼요. 스님이 선정(禪定)에 들어가 물고기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물고기가 게을렀던 스님이었어요. 제자는 물결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서 피를 흘리는 벌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자신의 등에 있는 나무를 잘라 게으르게 수행하는 이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요. 스승은 그 말을 듣고 나무를 잘라 목어로 만들었고 그 목어가 작게 변한 것이 목탁입니다.”

절마다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많은 이유는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라”는 의미이다.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듯이 항상 마음의 눈을 뜨라는 것.

남 팀장은 종소리를 들으며 기억해야 할 가르침은 “Don't worry, be happy”라고 말했다. 걱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종소리를 들으며 항상 그것을 자각하라고 했다.

낮은 턱을 넘듯 작은 마음을 먹으면

범종각에서 내려와 큰 법당으로 통하는 해탈문 앞에 섰다. ‘해탈’의 의미를 어렵게 생각하는데, 해탈은 문자 그대로 ‘해결할 해(解)’ 자에 ‘탈날 탈(脫)’ 자를 사용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문제를 해결한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를 뜻한다. 물질이나 명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현재 상태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면 이미 ‘해탈’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 중 하나가 부처님께 물었어요. ‘저는 고민이 너무 많은데 그 고민을 해결해주십시오’라고요. 그 말에 부처님은 ‘그렇다면 그 고민을 내게 보여 봐라’라고 하셨죠. 고민은 말로는 할 수 있지만 볼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고민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손바닥 뒤집듯 마음만 바꾸면 문제는 사라져요.”

해탈문에는 낮은 턱이 있는데, 그 턱을 넘는 것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건너가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건너갈 수 있다. 이처럼 걱정·근심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작은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해결할 수 있다. 큰 노력이 아니라 작은 마음만 바꾸면 된다는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해탈문에 낮은 턱이 있는 것이다.

절 한 번에 염주 한 알씩

법당에 들어가면 반배-세 번의 큰 절(삼배)-다시 반배를 하게 된다. 삼배를 통해 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위해 올바른 절의 방법을 배웠는데, 우선 몸의 긴장돼 있는 부위를 살피며 발가락을 모으고 반배를 한다. 이후 천천히 방석에 무릎을 대면서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엉덩이를 아래로 내린다.

이마를 방석에 살짝 대면서 손을 뒤집어 귀 위로 조금 올렸다가 다시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합장하며 올라오면 된다. 이러한 단계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가면 된다.

에디터는 절의 방법을 익힌 후 명상음악을 배경으로 108배를 했다. 108배는 염주 꿰기와 함께 이뤄졌는데, 절을 한 번 하고 난 뒤 사찰에서 준비해둔 실에 염주를 한 알씩 꿰며 108배를 채웠다.

숫자를 세며 108배를 하면 일반적으로 쉬이 지치는데, 염주를 꿰며 절을 하자 호흡도 가다듬어지며 힘도 크게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절을 모두 마친 후 염주가 완성되었을 때의 성취감도 컸다. 108배를 하면서는 불경을 외도 되지만 소원을 빌기도 한다. 현재 자신이 왜 절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08배 후에는 점심공양을 했는데, 정갈하게 차려진 밥과 찬들을 접시에 먹을 만큼만 담아 자리에 돌아와 먹었다. 스님과 참가자 모두 두 번씩은 접시를 비웠다.

선우스님과의 참선과 다담

점심공양 이후 남은 것은 선우스님과의 참선과 다담시간이었다. 선우스님은 출가한지 18년 된 스님으로 비구스님절인 금선사의 유일한 비구니스님이었다.

선우스님이 알려준 명상법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고개를 살짝 당겨 편안하고 깊게 호흡을 하며 들숨과 날숨의 흐름을 느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선우스님은 명상과 관념에 대해 간단하게 말을 전했다.

“우리는 편의를 위해 단어로 사물을 규정해놓지만 사실 모든 것은 따로 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는 나무를 보면 ‘나무’라는 단어를 쓰지만, 뿌리부터 잎까지만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하고, 햇빛이 있어야 하고, 돌이 있고, 빛이 있어야 하지요. 모든 것들은 하나로 연결돼 있어요. 산도 바다도 그래요. 산이 산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게 아니라, 인간들이 임의대로 부르는 것이지요. 산과 바다는 연결돼 있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호흡한다’라고 말하지만,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언어로 규정해놓은 관념이다. 관념의 세계에서 명상하며 느낀 것은 바람이 많이 불어 풍경소리가 쉼 없이 들린다는 것과 내가 가끔 졸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님이 바닥에 대고 두드리는 죽비소리가 가끔 들린다는 것이었다. 선우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명상은 ‘선(禪)’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명상 후 자리를 옮겨 다담시간을 가졌다. 선우스님은 향 좋은 녹차를 내주었다. 오롯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템플스테이를 찾는 이들도 있지만, 현재의 곤란하고 괴로운 상황에 대한 위로를 얻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람에게는 각자 살면서 가져가야 하는 시름 덩어리가 하나씩 있는데, 스님은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 현상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금선사에는 도심에서 사는 20~30대가 많이 찾아오는데, 각자 환경은 달라도 비슷한 업식에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찾아온다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통해 위로받고 싶다, 힐링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잠깐 쉬었다고 힐링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템플스테이를 통해 자신이 가진 고민이 별문제가 아니라는 실마리를 하나라도 잡아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가령 행정고시에 떨어져서 낙심한 분이 찾아오시면 ‘왜 행정고시에 따라 인생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고, 그것에 큰 의미를 두느냐’고 물어요. 그러면 그분은 ‘행정고시에 합격해야 인생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등등의 이유를 말씀하시죠. 그런데 행정고시는 그분께 그런 삶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요. 그건 본인이 행정고시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에요. 막상 행정고시에 붙어도 본인이 의미 부여한 삶은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일하며 주어지는 문제들,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이 쏟아지게 돼 있어요. 본인이 의미부여를 해놓고 스스로 그 의미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이 오게 되지요.”

좋은 직업을 가지려는 것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은데, 막상 일로 인해 자신과 가족들이 소외되고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마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소외다. 게다가 본인이 의미부여를 하고 그것에 들어가지 못하면 ‘실패’라고 이름 붙이고는 괴로워한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겁니다. 스스로 미리 정해놓고 그것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는데, 세상사 모든 문제의 발단이 그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의미부여 했다는 것을 자각하라

선우스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의미부여 없이 살게 되면 목표와 발전이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제 말은 돌이나 목석이 돼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미부여에 끌려다니지 않아요. 본래 정해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며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을 알라는 거예요. 자신이 부여한 의미에 지배받으면 괴로워져요.”

순간순간을 자각하면 삶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신이 스스로 저지른 행동이나 생각에 의해 그 대가를 되돌려 받게 됨)를 알면 삶은 어렵거나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펼쳐내고 있는 아롱다롱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 세상이 주는 의미와 물질로부터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인디언 속담에 어깨 위에 죽음을 얹고 살라는 말이 있어요. 어려울 땐 죽음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보세요. 사람은 아플 때나 극한 상황 앞에서 지혜로워지는 면이 있어요. 중심이 없으면 휩쓸리기 쉬운데, 그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것이 마음공부예요. ‘삶의 비밀이 과연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뜬구름을 자신인 줄 알고 살아가는데, 그 너머 하늘을 궁금해하면 물 흐르듯 인연은 생깁니다. 진리의 흐름이라는 것은 면면이 다 흐르고 있어요. 나라는 존재 너머의 나를 만나게 되는 것 또한 삶의 재미예요.”


고민은 상황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다담의 꽃은 질문과 답을 하는 과정에서 피어난다. 에디터가 선우스님에게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는 고민을 이야기하자, 스님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도 불필요한 생각’이라는 현답을 내주었다.

“사람이 일주일 이상 굶으면 다른 고민은 모두 사라지고 배고픔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현재의 고민이란 현재의 조건과 인연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고 실체는 없는 것이지요. 실체가 없으니 비울 수도 없고 끊어낼 수도 없어요. 생각을 끊어낸다는 것은 독한 생각이에요. 그것은 상황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컨트롤 할 수 없어요. 그러한 사실을 바로 인식하다 보면 자각할 힘이 쌓일 거예요.”

한나절 동안이었지만, 에디터가 경험한 템플스테이는 종교적인 이해와 접근보다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인지를 알려주고 자각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끙끙 앓는 문제의 대부분은 결국 자신의 틀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지어서 내가 그렇게 보고 있다는 자작자수를 아는 것. 세상은 선 그 자체인데 내가 지은 언어의 세계와 관념에 전도돼 사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 취재 곽은영 기자(kss@egihu.com) 촬영 김현진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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