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소리를 듣다…“인생이 달라졌어요”[병을 이겨내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9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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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청각장애 전정협 씨
인공와우 수술로 한쪽 귀 청각 되찾아
최재영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보청기만으로 한계가 있다면 인공와우 수술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집도한 전정협 씨(왼쪽)도 10년 넘게 보청기를 쓰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은 뒤 청력의 90% 이상을 회복했다. 세브란스병원 제공
28년 전인 1996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전정협 씨(39)는 그제야 청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언제부터 친구들의 말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 씨는 “증세가 그 전부터 있었는데, 너무 어려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여자 친구들과 대화할 때가 더 어려웠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한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나중에 전 씨의 ‘인공와우 수술’을 집도한 최재영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는 전 씨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범위를 넘어서는 고음이기 때문에 더 듣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담임 선생이 전 씨의 청각장애를 발견했다. 교사의 권유에 따라 부모님이 전 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검사 결과 실제로 전 씨의 청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청각장애 진단을 받게 됐다.

●10년 넘게 보청기 착용했지만…
처음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전 씨는 “평소에도 혼자 조용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안 들리면 안 들리는 대로 그냥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보니 큰 불편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방심하는 동안 청력은 계속 떨어졌다. 중고교 때는 수업 시간에만 잠깐 보청기를 착용했다가 뺐다. 친구들에게 보청기를 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전 씨를 사오정이라 불렀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는 의미에서다. 크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 무렵부터는 친구들의 입 모양을 보고 말뜻을 짐작했다.

고교까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훨씬 많아졌기에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귀 모두에 보청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일을 시작했다. 이제는 보청기만으로는 사회생활에 한계가 느껴졌다. 전 씨는 “사회복지사 업무를 시작하고 약 2년 흘렀을 때부터 업무가 다양해졌다. 동료들과 대화하거나 전화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입 모양을 보지 않고는 소통할 수 없으니 답답해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실제로 소통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니 승진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 돼 버렸다.

30세 때 대장 질환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간 김에 이비인후과 진료도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최 교수다. 최 교수는 전 씨에게 인공와우(달팽이관) 수술을 권했다. 최 교수는 “당시 전 씨의 청력은 양쪽 모두 10% 정도만 남았다. 보청기를 착용하고 입 모양을 본다 해도 대화 내용의 50%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직장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공와우 장치 중에서 뼈 안쪽에 삽입하는 내부장치. 전극 끝이 달팽이관과 연결돼 청각 신경을 자극한다. 세브란스병원 제공


●인공와우 수술 후 이명 사라져
청력이 심하게 떨어지면 보청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 교수는 “보청기는 소리만 확대하는 스피커와 비슷하다. 최대 30%의 청력만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청력이 50% 떨어졌다면 보청기를 착용했을 때 정상인의 최대 80% 수준까지는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청력이 70~80%까지 떨어졌다면 보청기를 착용하더라도 교정 후의 청력이 최대 50%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웅성대는 느낌만 들뿐 대화 자체는 불가능하다.

전 씨가 최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남아있는 청력은 10% 정도. 최 교수는 인공와우 수술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인공와우는 청각기관인 달팽이관의 청신경을 자극하는 장치다. 몸 안에 이식하는 내부장치와 바깥에 부착하는 어음처리기로 나눈다. 원리는 이렇다. 귀 뒤쪽 뼈 일부를 절개해 컴퓨터 칩 역할을 하는 내부장치를 이식한다. 이 장치에 연결된 전극은 달팽이관 내부로 삽입돼 청신경을 자극한다. 귀 밖에 부착하는 어음처리기는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꿔 내부장치에 전달한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최 교수는 “인공 와우 수술은 선천적으로 청신경이 없는 경우만 빼고는 대부분 시행할 수 있다. 다만 오래 방치하면 뇌의 청각영역이 쇠퇴해 수술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전 씨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할 뻔 했다. 다만 보청기를 쭉 사용했기 때문에 청신경이 그나마 자극됐고 따라서 뇌의 청각영역이 남아있어 인공와우 수술이 가능했다고 최 교수는 추정했다.

수술이 결정된 후에도 전 씨는 성공을 크기 기대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며 대화했기에, 청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최 교수와 대화한 후 마음을 굳혔다. 전 씨는 “최 교수님이 수술의 성공을 확신했기에 믿음이 갔다.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 청력이 더 안 좋은 왼쪽 귀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끝나 3일 만에 퇴원했다. 수술하고 10일 만에 이명이 많이 사라졌다. 원래 청력이 떨어지면 청각 세포들이 ‘더 잘 들으려고’ 과도하게 작동하는 바람에 이명이 생긴다. 그러니 이명이 사라졌다는 것은 청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좋은 징조다.
전정엽 씨가 인공와우 장치를 착용한 상태. 귀 뒤쪽으로 노출된 것이 어음처리기다. 세브란스병원 제공


●수술보다 어려운 재활 과정
인공와우 수술은 대략 1시간 정도면 끝난다. 최 교수에 따르면 수술 자체는 고난도가 아니란다. 게다가 수술 성공률도 100%에 가깝다. 그런데도 수술을 받은 사람 중에서 청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비율이 10% 정도 된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재활 과정에서 포기한 사람들이다. 수술을 버텨냈는데 왜 재활에서 ‘탈락’하는 걸까. 보통 청력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발견해 인공와우 수술을 한다면 재활 기간은 짧아질 수 있다. 반면, 청각장애 기간이 길수록 재활 시간도 길어진다. 최 교수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수술하면 바로 소리가 들릴 거라 기대했다가 재활하는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비율이 10%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20년 동안 제대로 듣지 못했던 전 씨는 특히 재활 과정이 어렵고 오래 걸렸다. 그 과정을 들어봤다.

2016년 1월, 수술 후 2주가 흘렀다. 귀 바깥에 어음처리기를 처음 부착했다. 재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첫 날은 어땠을까. 전 씨는 “잡음이 심했고, 모든 말소리가 헬륨가스 먹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무척 피곤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그동안 정상적인 소리를 듣지 못했던 뇌가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를 뇌가 인지하려면 수천 번 이상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끝없는 반복이 재활 환자를 지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다. 최 교수는 “최소한 6개월~1년을 인내하면, 치매와 인지장애가 아니라면 100% 효과를 보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1주일 후 두 번째로 장치를 조정했다. 첫 회에 전기자극을 강하게 줘 청신경을 깨웠다면 2회째부터는 자극의 강도를 조절하며 상태를 살펴본다. 이런 식으로 1주일 간격으로 장치를 조정한다. 5회까지 장치 조정을 한 결과는 어땠을까. 전 씨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보청기를 함께 착용하지 않으면 소리 구분이 어려웠다. 소리가 더 커진 것 같기는 했지만 맑지는 않았다. 조바심이 날 법도 했지만, 참았다. 재활의 성공 여부가 달렸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2016년 4월, 6회째 장치 조정을 하면서 언어평가를 했다. 보청기만 착용하면 30%를 들었지만 인공와우는 57%를 들었다. 두 장치를 함께 착용하니 모든 문장을 맞췄다. 신기하면서도 감사한 마음. 비로소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6개월 후인 2016년 7월. 언어평가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입 모양을 보지 않고도 92%를 알아들었다. 이때부터는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아내의 덕이 컸다. 정 씨는 매일 4시간씩 아내와 대화했다. 아내는 회사에서 있었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줬다. 반복 대화를 하면서 점점 많은 말을 알아듣게 됐다. 나중에는 아내의 말실수도 콕 짚어냈다.

최 교수는 “재활 훈련 과정은 외국어를 공부할 때와 비슷하다. 수십, 수백 번 듣고, 대화하고, 그걸 받아쓰면서 발음이 정확한지 등을 따져야 뇌에 입력이 된다. 듣기 위한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1년 만에 90% 이상 청력 회복
2017년 2월, 인공와우 장치를 착용한 지 1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우선 삶이 풍족해졌다. 전 씨는 “무엇보다 사람의 입 모양을 보지 않고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고, 좋았다”고 말했다. 업무에도 탄력이 붙었다. 덕분에 전 씨는 팀장으로 승진도 했다. 전에는 자동차 운전할 때 거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다. 정면을 바라보려면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면을 응시하면서도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하다.

인공와우 수술을 한 후 소리에 적응하며 청력을 회복하는 지표를 크게 7단계로 나눈다. 단계가 높을수록 난도가 높다. 맨 마지막인 7단계를 통과하면 ‘완치’로 규정하는데, 바로 전화 통화다. 사람의 입 모양을 볼 수 없는 데다가 자연적인 소리가 아닌 기계음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 요컨대 시각정보 없이 오롯이 낯선 음성을 이해해야 한다. 전 씨는 이 7단계를 1년여 만에 통과했다.

인공와우 장치를 착용한 지 어느덧 7년. 전 씨는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전 씨는 “눈이 나쁘면 안경을 착용하는 것처럼 귀가 나쁘니 인공와우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전 씨는 왼쪽 귀에만 인공와우 수술을 했다. 그 때문에 완벽하게 모든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모든 발음을 들을 수도 없다. 왁자지껄한 곳에서는 대화가 어렵다. 오른쪽 귀는 여전히 들리지 않기에 오른쪽 방향에서 누군가 말하면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른쪽 귀도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전 씨도 이 점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현행 건강보험 제도에서는 한쪽 귀에만 건강보험 혜택을 준다. 오른쪽 귀 수술하려면 비급여로 해야 한다는 것. 이 경우 수술비만 3000만 원이 넘는다. 전 교수는 “청각장애 환자들의 삶의 질을 위해서라도 귀 양쪽 모두 건강보험 적용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전정협 씨의 인공와우 수술 및 재활 투병일지>

1996년 청각장애 사실 처음 확인(12세)
2005년 본격적으로 양쪽 귀에 보청기 착용(21세)
2015년 12월 왼쪽 귀에 인공와우 수술 시행(30세)
2016년 1월 인공와우 수술 후 재활 본격 시작
2016년 1월~4월 매주 1회씩 인공와우 장치 조정
(이후로도 장치는 수시로 조정함)
2016년 4월 인공와우와 보청기 함께 착용하면 문장 100% 이해함
2016년 7월 인공와우 만으로 입 모양 보지 않고 문장 92% 이해함
2017년 2월 수술 1년여 경과 후 가장 난도 높은 7단계 전화 통화 성공
사실상 완치 판정
2017년 3월 이후 매년 2월 인공와우 장치 조정
2024년 4월(현재) 오른쪽 귀 인공와우 수술 검토 중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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