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반 타의반 ‘당하는 존엄사’ 없게 해야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자녀 부담-경제적 압력에 따라
강요받는 상황 막을 대책 필요

“왜 또 저를 살렸나요.”

폐암 말기의 김모 씨(70)는 의료진에게 메모지에 글을 적어 항의 표시를 했다. 그는 하루 전에 두 번째 심장정지가 됐지만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깨어나자 중환자실에서 ‘뚜뚜’거리며 들리는 각종 기기음에 또 눈물을 흘렸다. 다시 암의 고통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내과계 중환자실에는 10명 중 1명꼴로 연명치료를 위해 입원한 환자들이 있다. 이들의 팔목은 그동안 혈액검사를 위해 찔렀던 수많은 바늘 자국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회복 불가능한 이들에게 이번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은 스스로 자신의 연명치료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중환자실에는 사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서 건강을 회복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시간을 갖고 삶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의료계에서는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결정이 병원비 걱정이나 자식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생각, 보험금 문제 등 사회 경제적 압력으로 인한 ‘선택이 아닌 강요’가 되지 않도록 법적 윤리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말기 환자가 효과는 없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연명 치료 중단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대원칙은 환자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 중단이 결정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 실장은 “환자가 경제적 어려움이나 자식 문제 등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환자와 가족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며 “다른 진료과에 자문을 하고, 병원윤리위원회를 활성화하며, 다른 병원과 협조하는 등 여러 단계를 둬 환자가 치료 중단 여부를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만이 존엄사 결정의 전부는 아니며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준식 한국죽음학회장(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은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어야 진정한 존엄사라고 할 수 있다”며 “중년이 되면 유언장을 미리 써두고, 중요한 치료를 받기에 앞서 사전의사결정(의식을 잃어 자신의 의료적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차후 의료계획을 미리 짜는 과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유언장에 재산 문제, 자기 몸에 대한 처리, 장묘법, 통장 비밀번호 등 금융정보가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존엄사를 선택하기에 앞서 의사와 환자 가족이 환자 본인에게 현재 상태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정확한 상태를 알리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만 존엄사 선택을 위해서는 환자 자신이 임상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대개의 가족들은 환자에게 ‘곧 나을 것’이라는 긍정적 메시지만 던지며 정확한 상태를 전달하는 가족은 4명 중 1명도 안 된다”며 “존엄사는 환자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인 만큼 환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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