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한번만 해도 병원행… 건보는 몸살

  • 입력 2006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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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영국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A(35) 씨는 네 살배기 딸이 감기에 걸려 런던의 한 병원을 찾았으나 의사는 “집에서 따듯한 물을 3, 4일 먹이면 나을 것”이라며 돌려보냈다. 일단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거나 약을 처방받는 일에 익숙해 있던 A 씨는 “외국 의사들이 ‘웬만한 병은 푹 쉬면 낫는다’는 자연 치유법을 내세워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대체로 A 씨처럼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본보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2005년 국내에서 가장 환자가 많았던 상위 100대 질환 리스트’를 받아 서울시내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40명에게 보냈다. 가정의학과는 거의 모든 질환의 1차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한다.》

▽가벼운 감기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돼=이들은 “진료 경험으로 볼 때 당장 병의원에서 진료받지 않아도 될 질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인당 16.1개의 질환을 꼽았다. 이는 당장 병원에 가지 않아도 자연 치유되거나 자가 치유할 수 있는 질환이 16개가량이라는 의미다.

응답자 가운데 “모든 질환은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단 한 개의 질환도 체크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반면 절반을 넘는 54개 질환이 병원에 안 가도 되는 병이라고 응답한 의사도 한 명 있었다.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21명(52.5%)은 11개 이상 질환을 당장 병의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질환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10개 이하 질병을 체크한 응답자는 19명이었다.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질환 1위에는 감기(급성 상기도 감염·30명·75%)가 꼽혔다. 감기는 상기도(목구멍)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발생하는 질병으로 가벼운 목통증과 미열을 동반한다.

그러나 고열(38∼39도)이 하루 이상 지속되는 등 증세가 심하면 감기에 따른 합병증인 기관지염이나 폐렴일 수 있으므로 병원을 찾는 게 좋다.

감기를 포함해 가벼운 설사나 복통을 동반하는 ‘기타 기능적 장 장애’(22명·55.5%) ‘위염 및 십이지장염’(21명·52.5%) ‘소화불량’(20명·50.0%) 등 4개 질환은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꼽은 가벼운 병이다.

이어 알레르기가 대표적 원인인 ‘혈관운동성 및 알레르기 비염’(19명·47.5%), 일반적으로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 불리는 ‘자극성 장 증후군’(17명·42.5%), 잦은 기침을 유발하는 ‘다발성 및 상세 불명 부위의 급성 상기도 감염’(16명·40.0%), 중년 여성들의 얼굴 빨개짐, 가슴 두근거림 등을 동반하는 ‘폐경기 및 폐경기 전후 장애’(16명·40.0%) 등이 가벼운 질환으로 꼽혔다.

응답자들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그동안 진료 경험을 통해 평균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 병이면 당장 병원을 찾지 않아도 될 경증 질환”이라고 말했다.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할 질환=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40명이 모두 ‘꼭 가야 할 질병’ 또는 ‘한방에서 사용하는 병명이라서 잘 모르는 질병’이라고 대답한 질환은 봉소염, 급성 후두염(기관지염), 각막염, 원인 불명의 폐렴, 목 부위 관절 및 인대 이상, 결막 등 기타 장애, 협심증, 요도염, 역절풍 등이었다.

이 중 피부의 겉 부분(피하조직)에 세균이 침투해 고름이 발생하는 봉소염은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해당 부위가 강하게 화끈거리고 빨갛게 부어오른다. 또 심하게 쑤시면서 고름이 나온다. 이 병은 방치하면 세균이 온몸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신속하게 처치해야 한다.

각막염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다. 병에 걸린 눈을 만진 손으로 다른 눈을 만졌을 때도 전염된다. 결막에 장애가 생겼을 때도 비슷하다. 따라서 눈이 뻑뻑하고 붓거나 따끔거린다면 바로 병의원을 찾는 게 좋다.

폐렴은 일반적으로 세균 감염으로 발병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힘들다. 따라서 병을 더 키우지 않으려면 38도 이상의 고열이 하루 이상 지속될 때는 병의원을 찾아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다.

▽경증 질환은 건강보험 재정악화의 주범=일부 의료복지 전문가들은 “감기 등만 건강보험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도 연간 1조 원 이상 절약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감기 외에 모든 호흡기 질환을 합친 금액이다. 실제 2005년 감기를 비롯한 급성 인두염, 폐렴 등 전체 호흡기 질환에 지출된 건강보험 급여는 1조4505억여 원으로 전체 건강보험 재정의 8.1%를 차지했다.

그렇다 해도 경증질환을 줄이면 건보재정을 크게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응답 의사의 절반 이상이 경증 질환으로 지적한 4개 질환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지난해 건보재정의 1.2%에 이르는 2132억여 원을 아낄 수 있었다.

그 적용 범위를 8대 가벼운 질환까지 확대하면 절약할 수 있는 건강보험 재정은 4357억여 원으로 늘어난다. 이는 전체 건강보험 재정의 2.5%에 해당한다.

건강보험은 올해 1800여억 원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게다가 담뱃값 인상이 이뤄지지 않아 정부지원금이 줄어들고 중증 만성질환에 대한 보험혜택 확대가 예정돼 있어 내년에는 누적 적자로 돌아서 국민의 건강보험료 부담이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경증 질환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축소하는 등 혜택을 줄이거나 일부 경증 질환에 대해선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가벼운 질환이라도 지속 관찰은 필요”

자가치유 믿고 증세 심해질 때까지 방치하면 위험▼

본보의 조사는 ‘아프면 병원부터 가자’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보여 준다. 단 이 조사는 특정 진료과나 질환 전문의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질병에 대한 느낌은 주관적이다. 같은 병이라도 어떤 사람은 심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넘긴다. 병원에 가고 안 가고는 전적으로 환자 개인의 판단이다.

실제 설문에 참가한 한 교수는 “아무리 가벼운 질병이라도 일단 진단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병이기 때문에 치료를 안 받아도 되는 경증 질환이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은 의사나 약에 대한 의존도가 외국보다 높다는 게 의사들의 지적이다. 대부분의 교수가 “병의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환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아프다고 무조건 병원에 가기보다 가벼운 증세라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가 치유가 필요하다고 의사들은 조언한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 불리는 ‘자극성 장 증후군’은 설사나 복통 등을 동반한다. 이 질병은 병의원을 찾는 것이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대부분 스트레스나 식습관이 원인이므로 환자 자신이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거나 식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완치하기 힘들다.

여성들이 앓는 ‘폐경기 전후 장애’도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생활습관의 개선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의사들은 “경증 질환은 스스로 극복하려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혹시 다른 질병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경증 질환이라도 지속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에 가벼운 통증이 있더라도 이 같은 통증이 계속되고 그 증세가 심해진다면 당연히 병원을 찾아야 한다. 위암 등 환자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중증 질환의 증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이 조사는 질환의 리스트만을 보고 의사들이 판단한 것”이라며 “환자로서는 질환의 명칭을 명확히 알 수 없다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주사나 약만 요구할 게 아니라 일상에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들이면 고칠 수 있는 병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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