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객들 '야호'…산짐승들 '어휴'

  • 입력 2003년 4월 22일 18시 09분


코멘트

“산에서 제발 고함 좀 지르지 맙시다.”

호연지기를 기른다며 무심코 외치는 ‘야호’ 소리가 겁 많은 야생동물에게는 청천벽력이라는 야생동물 연구자들의 주장이 나왔다.

지리산에 풀어준 반달곰은 ‘야호’에 경기가 들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 다니고 있다. 설악산 깊은 곳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던 산양도 등산객들의 고함에 종적을 감추었다.

지리산 반달곰

서울대 환경대학원 이도원 교수(생태학)는 환경잡지 ‘이장’ 최근호에 고함과 괴성에 시달리는 야생동물의 피해 실태를 고발하며 “산에서 ‘야호’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이 교수는 “평지를 온통 시멘트로 발라 산으로 몰아내더니 이제 산에까지 몰려가 고함을 질러대 겁 많은 짐승들이 살 수 없게 만들고 있다”며 “외국의 어느 산을 다녀보아도 한국사람 처럼 산에서 고함을 질러대는 경우는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가을 단풍 관광객이 절정일 무렵에는 계속되는 단체탐방객의 소음 때문에 곰이 서식지인 전남 구례군에서 20㎞ 떨어진 경남 하동군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지리산 반달곰의 ‘아빠’인 국립공원관리공단 한상훈 박사(포유동물학)의 말이다.

한 박사는 “동물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놀랄 만큼 언제나 긴장하고 있다”며 “등산객의 고함과 괴성은 겁 많은 짐승과 새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어떤 짐승은 충동적으로 도망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달곰 관리팀 하정욱씨는 “방사한 반달곰에 발신기를 붙여 이들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등산객의 함성이 곰을 얼마나 놀라게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씨는 “처음에는 곰이 왜 갑자기 뜀박질을 하는지 몰랐지만 고함이 들릴 때마다 곰의 위치가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고함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올해 1월 1일 새벽 곰관리팀은 지리산 노고단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든 신년 해맞이 등산객에게 제발 ‘야호’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야 했다.

내설악의 대승령 일대는 평상시에는 인적이 드물어 천연기념물인 산양이 살던 곳이다. 하지만 가을이면 단풍과 일출을 보러 새벽에 대승령에 오른 많은 등산객들의 등쌀에 산양이 자취를 감추었다. 단체로 이곳에 오른 등산객들은 만세 삼창도 모자라 10초 동안 함성을 지른다.

새벽에 먹이를 찾는 습성을 가진 산양은 가을철에는 충분히 먹어 살을 찌운 다음 겨울을 나고 봄에 새끼를 낳는다. 가을 등산객들의 고함이 먹이활동과 안정된 번식까지 방해해 산양의 멸종을 재촉할 수 있다는 게 야생동물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다행히 산악인들 사이에서 자성이 일고 있다. 여행등산전문사이트인 sanyaro.com은 “구조신호인 ‘야호’를 스트레스를 푸는 데 쓰지 말자”며 ‘야호 하지 않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야호’는 독일 알프스지대에서 쓰던 ‘johoo’란 의성어가 어원이다. ‘야호’는 고립됐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조난신호로 흔히 쓰인다. 한국에는 20세기 들어 ‘야호’란 구호가 수입돼 등산객들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호연지기의 상징처럼 됐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