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본 세상]골프장 조경 모델은 '사바나평원'

  • 입력 2002년 4월 23일 18시 19분


29일은 제10회 ‘노골프데이’다. 세계 환경단체들이 숲의 파괴를 막기 위해 태국 푸켓에 모여 기념일을 만든 지 올해로 열돌이 됐다.

하지만 지구의 골프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골프없는날’이 무색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시의 콘크리트 사막을 떠나 푸른 초원을 밟는 골프 인구가 300만 명을 넘었다.

골프장의 넓은 잔디밭과 탁 트인 전망은 뇌에서 강한 쾌감 신호를 발생시킨다. 골프장 풍경이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 무대인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골프 코스 설계자는 사바나에서 디자인 소재를 많이 얻는다.

원래 우리는 수천만년 동안 어두침침한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숨어 과일을 따먹는 원숭이로 살아왔다. 하지만 거대한 지각 변동에 의해 동부 아프리카가 500만년 전쯤 건조한 사바나 기후로 바뀌었다. 남북 길이 6500㎞에 이르는 세계 최대 계곡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가 탄생하고 주변에 긴 산맥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계곡은 달에서도 보인다.

일부 원숭이가 용감하게 숲으로 뛰쳐나와 사바나 평원에서 사냥을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었다. 반면 서부 아프리카의 원숭이류는 계속 열대우림에 살면서 오랑우탄과 고릴라로 진화했다.

초원의 풍부한 사냥거리,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와 그늘, 작은 호수가 산재하는 사바나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고향인 것이다. 수백만 년에 걸친 사바나 생존 경쟁 속에서 뇌 용적이 3배나 커진 ‘호모 사피엔스’는 10만 년 전 각 대륙으로 이주해 현대문명을 이룩했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사바나의 향수를 갖고 있다. 미국 생태학회 회장인 고돈 오리언스는 여러 풍경 사진을 보여주고 좋아하는 경치를 고르도록 했는데, 대륙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바나 풍경을 가장 좋아했다. 우리 전통 마을마다 마당 한복판에 서 있는 느티나무도 사바나의 큰 키 나무 그늘과 흡사하다.

우리는 지금도 숲을 ‘인공 사바나’로 계속 바꾸고 있다. 골프장과 집 앞마당의 잔디밭이 그것이다. 하지만 겉보기만 비슷할 뿐 생물다양성이 높은 자연의 사바나와 농약으로 유지되는 골프장 생태계는 다르다. 잔디밭은 숲보다 물을 머금는 능력이 떨어져 물 기근을 일으킨다.

골프장과 잔디마당은 돈 있는 사람만 즐길 수 있다. 그보다는 누구나 찾는 마을 공터, 빌딩, 쇼핑센터, 학교, 병원에 사바나를 만들면 어떨까. 건물 안에 나무나 관상수를 심으면 스트레스가 줄고 두뇌 활동이 촉진되며 환자도 빨리 회복된다. 또 사람의 접촉을 늘려 공동체 의식이 높아진다. 자연에서 진화한 우리는 자연과 결합할 때 ‘인지적 평온’을 얻기 때문이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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