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이 다 있었는데…[권용득의 사는게 코미디]〈13〉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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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만화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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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만화가
권용득 만화가
원고 마감이 겹쳐 송년회 술자리 참석이 불투명해졌지만, 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게다가 하필 이 시국에 모처럼 대청소하기로 했지만, 계획이 다 있었다. 등교하는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치운다. 부리나케 청소기를 돌린 다음 뒷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점심시간 전에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단돈 1500원에 갓 볶은 원두를 내린 아메리카노를 리필해주는 동네 북카페에서 아메리카노는 양심껏 두 번만 리필한다. 배가 고프면 샌드위치도 하나 주문한다. 그렇게 아메리카노를 석 잔 마시는 동안 원고를 모두 마감하면 끝! 그때까지 내 계획은 완벽했다. 보일러가 고장 나기 전까지는.

요 며칠 보일러 컨트롤러 화면에 암호 같은 숫자가 깜빡거려 그럴 때마다 전원플러그를 뽑았다 다시 꽂았다. 아무래도 그게 단말마의 비명이었던 모양이다. 보일러 업체는 주요 부품이 단종됐을 뿐만 아니라 교체 시기도 이미 지났다며 보일러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보일러 기사가 새 보일러를 설치하는 동안 아내는 다른 볼일이 생겨 앞서 말한 뒷일은 내 몫이 됐다. 이를테면 걸레질과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를 누군가가 해야 했다. 다행히 걸레질을 마칠 무렵 새 보일러는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계획은 약간의 차질이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만 보일러실이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보일러실을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럼 보일러실 청소는 다른 볼일을 보고 있던 아내 몫이 된다. 계획에 없던 뒷일에 보일러실 청소까지 하고 나가는 자상한 남편이 되든지(to be) 아니면 비정한 남편이 되든지(or not to be), 그것이 문제였다(that was the question). 원고 마감과 송년회 술자리보다 가정의 평화가 먼저였던 나는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보일러실 청소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동안 우리 집 보일러실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던 미지의 공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욕실에 쭈그려 앉아 바지 뒤춤을 추스르며 새까매진 걸레를 빨고 있을 때였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야? 아직 안 나갔어?” 창밖으로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는 한 해였다. 출간하기로 했던 책은 도중에 엎어지고, 새 작품은 구상만 해놓고 손도 대지 못했다. 그나마 돈벌이는 가까스로 예년 못지않게 했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보일러실 청소까지 하는 바람에 아내한테 칭찬도 듣고, 적어도 이 글은 아메리카노 없이 용케 마감했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제현의 다가오는 새해는 부디 나의 오늘 같지 않기 바란다. 설령 나의 오늘보다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뭐든지 계획대로 된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인생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권용득 만화가
#송년회#계획#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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